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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부정당한 공정·정의·평등…‘촛불가치’ 회복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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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그 이후’ 연속 기고

박명림 연세대 교수·김대중도서관장

문재인 정부 조국사태 대응

탄핵촛불 가치에 부응 못해

윤리·도덕 문제로 위기

민주공화 요체는 대화와 타협

비서정치·운동정치 끝내고

진영논리 넘어 국정 대전환을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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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조국 사태로의 역전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급변이다. 국민의 반응은 당혹과 분노, 실망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왜 이토록 빨리 위기에 직면하고 말았는가?

한 인물의 인사 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공정·정의 및 민주공화라는 문재인 정부 출범의 근본 대의를 정면으로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임기 절반 동안의 정책 수행 부진에 더해진 사회윤리 희롱과 가치농단은 정부를 순식간에 위기로 몰아넣었다.

시민들은 다시 광장으로 쏟아져나왔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시위 주체와 참가 세력은 달라졌지만, 광장에서 분출된 가치와 구호는 3년 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진영에 따른 파당적 요구를 제외한다면, 시민들이 광화문과 서초동에 모여 부르짖은 것은 3년 전 최순실 사태 당시와 동일한 공정·정의·공공성·법치·법 앞의 평등이란 가치였다. 이 가치들이야말로 진보와 보수 두 진영을 넘는 보편적 시대정신이자 개혁과제라는 뜻이다.

따라서 지금은 문재인 정부에도 결코 나쁜 상황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 입장에선 최순실 사태를 통해 ‘물려받은 통합과제’와 조국 사태로 떠안게 된 ‘추진해야 할 개혁과제’가 같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절묘한 위치다. 두 광장의 공통 요구를 실현하기만 한다면, 대한민국은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조국의 가치농단을 일거에 해결할 절호의 기회를 맞은 셈이다. 문제는 진영 논리를 넘는 국가운영의 철학과 능력이다.

조국 사태는 윤리와 도덕의 문제에 관한 한 진영 구분은 의미가 없다는 점을 뚜렷이 보여준다. 판단의 기준은 오직 실제 행태와 업적이 되어야 한다. 진보와 보수를 흑백과 선악의 논리에 바탕해 선험적으로 접근해온 오랜 편견을 버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아무리 업적과 가치의 ‘이중 위기’에 직면했다고 해도, 다수의 시민은 여전히 국정농단 세력의 도덕적·윤리적 복권까지 허용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문재인 정부에 허용된 관용의 시간이자 개혁의 공간이다.

이성적 시민이라면 링컨의 말대로, 옳은 쪽을 지지해야 하는 것이지 내가 지지하는 쪽이라서 옳은 것이라 여겨서는 안 된다. 조국 사태는 말과 구호가 아닌 행동과 결과로서 심판받아야 한다는 정치의 본질을 정확히 드러내주었다. 양극단의 파당적 진영 논리를 제외한다면, 공정·정의·공공성·법치·평등의 가치는 이제 확고한 사회 공준으로 자리잡은 게 분명하다.

혁명과 반동의 시대에 유럽의 한 시인은 ‘돼지조차도 토할 더러운 인간’을 이야기한 바 있다. 진보는 최순실 사태에서, 보수는 조국 사태에서 이 ‘돼지조차 토할 더러움’을 보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 시대는 이 두 더러움을 성찰의 자양분으로 삼아 소중한 공준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인물과 진영 중심의 대결 논리를 벗어나, 가치와 행복이 중시되는 나라를 꿈꿔온 시민들은 이 지점에서 안도와 위안을 얻고 희망도 품게 된다.

처음 문재인 정부 앞에는 두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어렵지만 쉬운 길’로서 연합을 통해 압도적인 탄핵 연대를 지속하는 선택이었다. 이는 의회 중심의 입법·정책 연대를 통해 개혁과 통합을 가능하게 하였을 것이다. 둘째는 ‘쉽지만 어려운 길’로서 청와대 중심의 독임과 단독 국정운영이었다. 소수파 정부로서 연합을 추구했던 김대중·노무현과는 반대의 길이다.

특히 노무현은 정몽준과의 연대부터 시작하여 박근혜 통일부 장관 임명 시도, 의회의 총리 추천, 대연정 시도를 포함해 끊임없이 연합정치를 추구하였다. 그의 꿈은 연립과 연정, 타협과 공존이 가능한 정치와 제도를 만드는 것이었다. 연합 대신 독임, 의회와 내각 대신 비서 정치를 중시한 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부가 모두 국민의 대규모 저항에 직면하였다는 점은 김대중·노무현의 길을 깊이 반추하게 한다.

앞선 사례들에 오늘의 상황을 비추어볼 때, 문재인 정부엔 세가지 방향과 과제가 중요해 보인다. 첫째는 공정과 정의, 평등과 법치라는 국정의 근본 가치와 목표를 회복하는 일이다. 국정 전반에서 가치 회복을 통해 국민 동의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는 더 어려워질 것이다. 조국 사태는 가치농단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국정 가치의 회복이 없다면 비록 임기가 남아 있어도 식물 정부가 되고 만다.

둘째, 국정운영 중심축을 전환하는 일이다. 청와대가 주도하지 않는, 의회와 내각 중심의 국정운영을 제안한다. 민주주의에서 비서 정치는 위험하며 성공한 사례도 없다. 의회와 내각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할 때 입법기구 및 정부조직 전체의 능동적 참여를 통한 국정운영이 가능하다. 대통령 스스로 국민 절반에 못 미치는 지지로 당선된, 대의 및 집행 기구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게다가 이제 임기 후반이다. 한국의 권력 구조는 임기 초의 ‘대통령당’을 임기 후반 ‘후보당’으로 급변시킨다. 대통령은 ‘후보당’(여당)과 ‘반대당’(야당) 사이에 고립된다. 비서 정치는 자멸 행위인 것이다.

셋째, 정치의 본령인 대화와 타협의 복원이 필수다. 역설적으로 조국 사태는 정부에 운동이 아닌 정치로 돌아갈 기회를 열어주었다. 이제 운동에 의한 정치를 끝내야 한다. 운동을 정치로 전환해야 한다. 민주공화국에서 정치는 시민을 일상으로 돌려보내는 능력이다. 정치 안정과 시민 안온은 동전의 양면이다.

운동과 정치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운동은 정의를 독점하여 상대를 부정하고 타도하려 한다. 반면 정치는 상대를 인정하고 타협한다. 학생운동·지식인운동·시민운동의 방식을 지속한다면 입법·의회·내각을 통한 민주공화 방식의 국정운영과 업적 창출은 어렵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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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시민들에게 현재까지 문재인 정부가 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적폐청산과 조국 사태 두가지를 이야기할 것이다. 대통령과 정부·여당은 억울하겠지만 현실이다. 검찰 개혁은 필수다. 그러나 거기에 매달리다 더욱 절실한 일자리·재벌·노동·교육·선거 개혁을 놓쳐서는 안 된다. 조국 사태를 실패의 변명거리로 삼아서도 안 된다. 조국 사태를 통해 분출된 특권과 반칙, 비리와 세습 구조에 대한 절망과 분노를 희망과 기회로 바꿔야 한다. 그러려면 삶의 문제에 집중하는 국정운영이 절실하다. 이것이 핵심이다.

나아가 조국 사태와 가치농단을 검찰 개혁으로 왜곡·축소하지 말아야 한다. 조국 사태는 국정 전반에 대한 대수정을 요구한다. 공적 신뢰는 사람이 아닌 행위에 대한 신상필벌에서 출발한다. 친일을 반공으로 덮고, 인권탄압을 경제개발로, 전체주의 독재를 민족주의로, 전쟁을 통일로 치환·전도해온 좌우 독재의 잘못된 논리를 따라 검찰 개혁을 추진하고, 가치농단은 방면해도 좋다는 식이라면 공동체의 성숙은 불가능하다. 그런 식이라면 보수 세력을 비판해서도 안 된다.

인류사에 어렵게 등장한 민주공화국은 자기 부정 및 타자 수용의 사상에서 출발하였다. 즉 공존과 타협의 체제였다. 이전 체제들이 독임이었다면 민주공화국은 권력의 분산·소통과 견제·균형을 근본으로 삼았다. 시민들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소리 높이 외쳐 박근혜 정부의 불통과 독임, 국정농단으로부터 민주공화의 골간을 복원시켜주었다. 문재인 정부 역시 대화·타협이라는 민주공화의 요체로부터 이탈했던 지난 시기를 맹성하지 않으면 남은 임기도 크게 어려울 수밖에 없다.

민주공화의 근본 원리는 자기 쪽, 자기 정부의 성공이 국민 전체, 나라 전체의 발전과 함께 가는 것이다. 조국 사태로 문재인 정부와 개혁 세력은 성공과 실패, 복원과 자멸의 갈림길에 놓였다. 성공과 복원을 향한 길은 철저한 자기 개혁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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