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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제현주의 굿 비즈니스, 굿 머니]200년을 기다릴 순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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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의 공동의장 멜린다 게이츠.


여성 혁신가 8인의 이야기를 담은 책 <나는 오늘도 내가 만든 일터로 출근합니다>에서 저자 홍진아는 30대 중반 이후에는 어떻게 일하며 살아야 할지 막막하고 불안했던 마음을 털어놓는다. 일의 형태나 환경이 바뀌어 가는 중에도 여전히 롤모델로 삼을 만한 여자 선배를 찾기 어려웠고, 그러던 중 10명 연사 전부가 남자로만 들어찬 4차 산업혁명 콘퍼런스를 보고 직접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우리 사회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여성에게 마이크가 주어지지 않고 여성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스스로 그런 얼굴들을 찾아나서기로 한 것이다. 계속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용기는 먼저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구체적인 얼굴들을 떠올릴 수 있는 데서 온다. 주변이 그런 얼굴들로 둘러싸여 있다면 그 효과가 얼마나 큰지 깨닫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얼굴을 다 꼽아도 손가락이 남는다면, 나는 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드는 건 당연하다.

경향신문

지난 10월2일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의 공동의장인 멜린다 게이츠는 ‘타임’에 기고한 칼럼에서 앞으로 10년간 10억달러(약 1조2000억원)를 젠더 평등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쓰겠다고 밝혔다. 홍진아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남자로만 빼곡한 4차 산업혁명 콘퍼런스 무대였다면, 멜린다의 마음은 2018년 포천 500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명단이 움직였다. 명단에는 제임스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 CEO가 여성 CEO 전체보다 많았고, 멜린다는 화가 났다고 말한다. CEO를 꿈꾸는 젊은 여성이 CEO로서 떠올릴 수 있는 제임스의 얼굴이 아무 이름을 가진 여성의 얼굴보다 많다면, 남자를 닮기로 애쓰든가 아니면 자신의 꿈을 조정하게 될 것이다. 양쪽 모두 그녀에게도 우리 사회에도 좋은 일이 아니다. 멜린다는 젠더 평등은 미국에서 자금을 제대로 지원받지 못했던 의제라고 밝힌다. 민간 기부자들은 여성 이슈에 1달러 기부할 때, 고등교육에 9.27달러, 예술에 4.85달러 기부했다면서, 더욱 주목할 것은 여성 이슈에 기부된 1달러 중 90센트가 출산 보건에 쓰였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한다. 출산 보건의 문제는 중요하지만, 여성의 삶에서 중요한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멜린다는 향후 10년간 10억달러를 들여 세 가지 사안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한다. 첫번째는 여성의 직업적 성취를 가로막는 장벽을 없애는 것이다. 그러면서 돌봄의 주된 책임자로서 부담을 떠안는 현실, 여전한 성희롱과 차별, 그리고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들을 주된 장벽으로 꼽는다. 두번째로 집중할 사안은 테크, 미디어, 공직 등 사회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분야에서 여성 리더들을 빠르게 양성하는 것이다. 이런 분야로 진입하는 전통적 경로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남성에게 적합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다양한 배경의 여성들에게 공평히 열려 있는 새로운 경로들을 많이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주와 투자자, 소비자, 종업원들을 움직여 변화가 필요한 기업 및 조직들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멜린다는 사람들을 설득해 움직이게 하려면 데이터가 필요하며, 제대로 된 데이터를 만드는 데 자원을 투입할 것이라고 밝힌다.

10억달러의 자원을 투입하는 이유가 젠더 평등이 그저 ‘옳은 일’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10월15일 한국 세계여성이사협회는 ‘여성의 경영 참여 확대, 기업의 도전과 과제’라는 주제로 연례포럼을 열었다. 세계여성이사협회는 상장기업 및 일정 규모 이상 비상장기업의 여성 등기이사들로 이루어진 단체로 한국에는 70여명의 회원이 있다. 이사회 및 기업 임원진의 다양성이 경제 및 사회의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기초로 여성의 경영 참여 확대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이날 포럼의 기조강연에 나선 일본의 화장품 그룹 시세이도의 회장 마사히코 우오타니는 2014년 이래 일어난 시세이도의 혁신과 성장의 주된 동력은 다양성의 강화였다고 말했다. 시세이도는 이사회 내 여성 등기이사 및 감사의 비율을 45%로, 여성 임원 비율을 38%까지 늘렸다. 같은 기간 시세이도는 매출 성장률 연평균 9%, 영업이익 성장률 연평균 41%를 기록했다. 글로벌 시장의 매출 비중이 높아지고 브랜드 이미지는 젊어졌다. 이런 성과가 시세이도에만 가능했던 특별한 일은 아니다. 여성에게 평등한 환경과 기회가 주어질 때 어떤 경제적 성과가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사례와 데이터는 숱하게 많다. 젠더 감수성을 높여 좋은 투자 기회를 찾아내는 ‘젠더 렌즈 투자’가 새로운 투자 전략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여성 창업자 및 CEO가 이끄는 기업이 투자자에게 좋은 수익률로 돌려준다는 데이터도 여러 차례 발표된 바 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멜린다는 “세계경제포럼의 추정에 따르면 미국은 젠더 간의 평등에 다다르는 데 208년이 걸린다”며 10억달러가 촉발할 노력들이 이 시간을 현격히 줄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미국에 208년이라면, 한국의 우리에게는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젠더 평등 순위에서 한국은 140개국 중 115위였다. 미국은 51위였다. 멜린다 게이츠의 글을 읽으며, 나는 10억달러라는 돈의 크기 못지않게 10년이라는 시간에 마음이 갔다. 큰 자원만큼이나 길고 꾸준한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먼저 시작한 곳이 더 빨리 더 큰 결실을 확인하게 될 것은 자명하다.

제현주 임팩트 투자사 옐로우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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