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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화)

[매경이 만난 사람] 장편 `천년의 질문` 펴낸 소설가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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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조정래 소설가와 10일 경기 분당 태봉산 자락의 자택 집필실에서 만났다. 신작 `천년의 질문`을 육필로 쓴 편백나무 책상에서 그는 명저 `태백산맥` 이후의 30년을 회고했다. [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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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백나무 탁자 중앙엔 여섯 글자가 적혀 있었다. '문학, 길 없는 길.' 정자체를 힐끔거리자 무명 적삼의 노작가가 말을 이었다.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말이지요. 문학을 인생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겠지요." 눈앞 소설가의 일생이 그랬다. 막힌 곳에서 길을 모색했고 길이 만들어지면 길을 버리며 다음 처소를 향하는 삶. 이번 소설도 '길 없는 길'만 우직하게 걷던 인생길과 무관하지 않을 터. '국민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담은 장편소설 '천년의 질문'을 낸 조정래 소설가(76)를 경기 분당 태봉산 자락 자택 집필실에서 만났다. 평생 육필을 고집한 까닭에 오른손 엄지손톱이 사선으로 닳았지만 족히 1만권은 됨 직한 책기둥을 떠받치듯 열정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11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 대화까지 엮어 노작가의 정신을 구어체로 옮긴다.

―국민이 국가 존재 이유를 의심하는 '주객전도'에 답할 소설을 구상 중이라고 3년 전 인터뷰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소설은 그 해답처럼 다가옵니다.

▷예수가 살던 시대에도 나라는 있었고, 석가모니 세상에도 국가가 존재했잖소.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부패는 역사상 존재했던 저 모든 국가의 수천 년 고질병이었지. 동시대 풍경은 또 어떻습니까. 세계 192개국, 죄다 똑같은 생각 아닙니까. 다들 궁금하잖소. 국가가 국민에게 무엇이냐는 질문 말이오. 고민을 건넸을 뿐 응답은 독자 몫입니다.

―소설이 세상을 바꾼다는 믿음엔 변함없으십니까. 질문과 응답의 길항으로서.

▷기계만 발명품이 아니오. 종교, 정치, 언어도 정신적 작용의 발명이었지. 언어 가운데 앞선 카테고리를 점유하는 소설도 인간 삶에 유익한 발명품입니다. 인간과 역사에 대한 탐구가 곧 소설이란 뜻인데 그 탐구를 정의한다면 불의와 진실이란 대립항 사이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과정 아니겠소. 고뇌 없는 문학은 반신불수(半身不隨)요, 시대의 갈등을 발견할 수 없다면 소설이 아니지.

―입법, 사법, 행정, 재벌, 언론이 부패한 사슬로 엮이는 비판적 소설입니다. 신음하는 민중의 배후엔 늘 악한 시스템이 존재했습니다. 적폐는 누구입니까.

▷치졸하고 유치하고 사소하고 소모적인 정치인이겠지. 막말과 악다구니, 쌍소리로 공격하며 민생은 눈물 흘리며 파탄이 나는데 돌보지 않는 저들 말이오. 보시오. 국회의원 1인이 매년 세비 7억원을 씁니다. 저들이 지출 7억원짜리 기업이라면 300개 기업이…. 참나, 저 무슨 한심스러운 짓거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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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소설가가 `천년의 질문`의 육필 원고와 130개가 넘는 취재수첩 앞에서 웃고 있다.


―국회와 국민의 괴리는 늘 큰 듯합니다.

▷지금은 중대한 시기요. 미국과 중국이 경제전쟁 중이란 말입니다. 그건 남북 관계에 미치는 영향도 지대합니다. 여야가 똘똘 뭉쳐야지. 국민 아우성이 저들에게만 안 들리는 겁니다.

―'천년의 질문'에 깃든 시대정신을 압축한다면 무엇일까요.

▷두 가지야. 첫째, 모든 권력자는 국민 앞에 겸손하라. 둘째, 모든 국민은 국가에 국가의 의무를 요구하라. 그게 전부요.

―소설 후반부에 등장하는 북유럽 모델이 우리네 방향일까요.

▷자본주의 한계를 슬기롭게 극복한 국가들이지요. 언론을 포함해 한국 권력층이 부화뇌동하며 재벌들 논리에 편승할 때 북유럽은 인간을 존중하는 사회가 됐습니다. 법을 지키고 살아도 모두가 함께 잘사는 모델이란 말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두려워해야 합니다.

―북유럽을 말씀하시니 '헬조선'이란 자조의 표현이 떠오릅니다.

▷절망을 표현한다는 건 젊은 세대의 자유로운 권한입니다. 치욕적인 현실을 '헬조선'이란 단어로 표현 가능한 사회마저 건강한 겁니다. 서독(西獨)에 광부와 간호사로 떠나던 시대는 지났으니, 그때보단 살기 좋아졌잖소. 그런데 말이오. 반대로 생각해봅시다. 그건 젊은 세대에게 조언 삼아 하는 얘기지, 기성세대가 마땅히 강요할 얘기는 아닌 거지. 불평하지 말라고 저들에게 요구할 순 없는 거 아니겠소. 젊은 세대의 인내에 기성세대가 협조부터 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작년은 소설 '태백산맥' 출간 30주년이 었습니다. 한 세대가 바뀌는 기간을 통상 30년으로 은유하지요. 이제 '태백산맥'도 어엿한 성년입니다. 애틋한 세월입니다.

▷정말 한 세대가 흘러갔나 보더라고…. 요즘 대학에 강연을 가면 '태백산맥'에 학생들이 사인을 요청하며 이렇게 말해요. "선생님, 우리 엄마 아빠가 정말 '광팬'이었대요." 본인이 읽었다는 얘기는 없고 부모 세대 얘기를 하더라고(웃음). 그런데 말이지, 벌써 세월이 그렇게 지났던가. 아직 '태백산맥'이 소임을 다하진 않았는데, 그렇지 않소? 정치에 무관심한 건 자기 인생에 무관심한 거거든.

―이념 갈등을 둘러싼 한국의 30년사가 '태백산맥'의 각주(脚註)란 생각도 듭니다. 교착된 정세를 어떻게 보십니까.

▷풀기 어려운 고차 방정식이에요. 협상은 보는 방향이 같아야 하는데, 이건 마주 보고 달리는 기차거나 아예 따로 달리는 기차거든. 레일이 달라도 한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혜안은 없으십니까.

▷난 이렇게 생각해요. 특정한 나라 말고 유엔 본부에서 협상을 연다. 세계 192개국 대사가 참석해 보증을 선다. 동시에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북한에 들어간다. 누가 들으면 소설가의 유치한 소설적 상상력이라고 손가락질할까 몰라…. 하지만 확신합니다. 북한의 백지 항복을 원한다면 원하는 걸 모두 다 들어주고 전 세계가 도장 찍어 평화협정과 불가침조약을 맺는 그림을 그려보자고요. 속내를 숨기고 의심하면 답이 없어. 허심탄회한 길뿐이야.

―성년이 된 소설을 기념해 올리는 관념 섞인 질문입니다. '태백산맥' 염상진이 지금 여기에 앉아 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어떤 대화가 오갈까요.

▷염상진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인간 존재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거야. 사회주의가 종말을 고했으니까. 사회주의는 패배를 인정해야 합니다. 염상진이 이 자리에 있다면 그런 얘길 나누지 않을까 싶소만. 밤을 지새우는 날이겠지.

―그는 패배를 인정할까요.

▷'당(黨)은 무오류'라고 선언하는 자가당착이 사회주의의 첫 번째 모순이었지. 인간의 공통점은 모두가 불완전하다는 거잖아.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 모여 만든 당더러 무오류라고 선언하는 바로 그 오류가 사회주의 최대 실수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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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실수는요.

▷창의적이고 개성적이며 독립적인 인간을 말살한 오류랄까. 그렇다고 불평등만 낳은 자본주의도 병폐야. 쿠바도 미국과 수교하면서 경제적 자유주의로 나아갔고 베트남도 이제 자본주의만 존재하잖소. 후진국일수록 자본의 모순이 심해졌어. 빈부 격차가 상상을 초월하잖소. 불평등은 인류의 대재앙이오. 극복이 요원한 난제지.

―내친김에 김범우도 앉힐까요.

▷염상진이 시대적인 인물이라면 김범우는 항구적인 인물이오. 올바른 인간의 길을 찾고자 한 지식인이 김범우야. 모든 지식인은 김범우 같은 사람이어야 해요. 여러 이름으로 그는 살아 있어요.

―다소 가벼운 질문으로 넘어갈까요. 평생 원고지에 직접 쓰시는 이유는요.

▷컴퓨터로 쓰면 사람이 기계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그 기계에 사람이 실리게 되는 것 같거든. 문장 농밀도를 유지하려면 손으로 써야 합니다. 생각을 되씹을 시간과 공간도 내겐 필요합니다.

―애용하는 펜이 있으십니까.

▷예전엔 '파카21' 만년필로 썼어요.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만년필 무게도 부담스럽더라고…. 몇 번의 실험을 거쳐 모나미 네임펜으로 굳혔습니다. 가볍고, 거침이 없거든. 한 자루면 원고지 30~35매 정도 나옵디다. 다 쓴 펜도 안 버리고 박스째로 있소. 빈 껍데기라도 영혼이 서려 있는 것 같아. 아, 김훈 선생은 스테들러 연필로 쓴다면서요. 이제 딱 둘 남았구먼(웃음).

―계급이란 주제가 선생님과 무관치 않아 보이는데, 영화 '기생충'도 보셨는지요.

▷개봉 첫날에 제일 먼저 보러 달려갔지. 계층 간 문제를 적확하게 짚었어요. 좋은 영화야. 근데, 송강호 식구가 부잣집에 큰 장애물 없이 들어가는 건 좀 작위적인 것 같아…. 나라면 그렇게 안 썼을 걸. 아, 이것도 직업병인가(웃음).

―무거운 질문입니다. 이어령 선생님께서 세초에 투병을 스스로 밝히셨습니다. '태백산맥' 검찰 내사 당시 이어령 선생님께서 막후에서 선생님께 도움을 주셨습니다. 지면을 빌려 전할 말씀이 있으십니까.

▷그분은… 보수이면서 진보를 살린 귀인이에요. 1965년 남정현 선생 '분지' 필화 사건 당시에도 이어령 선생이 살려낸 거 아닙니까. '태백산맥' 사건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진보적 보수'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모두가 당도할 죽음 앞에 의연히 대처하는 큰 어른의 모습, 죽음이란 삶이 형태를 달리하는 것일 뿐이라는 저 태도마저도 그 어른의 마지막 참교육이랄까. 존경합니다. 그분은 시대를 앞서간 분이에요.

―차기작은 구상 중이십니까.

▷모든 작가들은 두 가지 공통적인 소망을 갖고 있어요. 책상에서 글 쓰다 엎드려 죽길 바라고, 생애 마지막 작품이 대표작이길 바라지. 그 말을 뒤집으면 쓰는 작품마다 대표작이어야 하는데, 그러면 소망이 아니라 욕심이 되겠지요. 마지막까지 난 현역으로 남을 겁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예술가는 불행함으로써 더 행복할 수 있고 결핍됨으로써 더 만족스러울 수 있는 삶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유명한 표현인 '황홀한 글감옥'도 같은 뜻이겠지요. 그러나 고통으로 점철된 일생의 글감옥에서 수인(囚人)의 자리가 후회되던 날은 없었는지요.

▷일상적인 유희를 배격하는 삶이었습니다. 술도 안 마셨고, 안 써지면 더 붙들었지…. 지금 앉은 이 나무의자가 한번 앉아버리면 뛰쳐나갈 수도 없는 형틀 같소. 길 없는 길이지. 실은 이번 책 탈고하고 탈장(脫腸)이 또 왔어. 중간에 수술하려다 집필 계획이 틀어질까봐 미뤘지. 평생 글 쓰며 손가락 마비에 위궤양에 탈장 두 번. 의사가 이제 그럽디다. 하루에 두 시간 이상 앉지 말라고. 그건 항복이고 포기선언이니, 난 그건 못합니다. 이제사 돌아보면, 몸이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 환희는 명확하게 다가왔다오. 최선을 다해 원고지를 채우면 소설은 거대하게 메아리치며 내게 돌아왔거든. 참, 그러고 보니 고통만이 존재의 증거였던가…. 그러니, 다들 보시오. 인생(人生)이란 두 개의 돌덩어리로 건너는 징검다리야!

■ 소설가 조정래는…

△1943년 전남 승주군 선암사 출생 △1959년 서울 보성고 입학 △1962년 동국대 국문과 입학 △1967년 김초혜 시인과 결혼 △1970년 현대문학 등단 △1977년 민예사 대표 △1997년~현재 동국대 국문과 석좌교수 △1981년 현대문학상 △1982년 대한민국문학상 △1988~1991년 '태백산맥'으로 성옥문학상·동국문학상·단재문학상 △2017년 은관문화훈장 △주요 작품 '태백산맥' '한강' '아리랑' '정글만리' '풀꽃도 꽃이다' 등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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