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30 (화)

[매경이 만난 사람] 가수 인생 60년 `한국 전통가요 산역사` 이미자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 대담 = 김주영 문화부장

매일경제

서울 신라호텔 카페에서 만난 가수 이미자는 음악 인생 60년 희로애락을 들려주면서 환하게 웃었다. [김재훈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올해 데뷔 60주년을 맞은 가수 이미자(78)는 최근 세종문화회관에서 기념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그런데 공연 후 '이미자 은퇴선언'이 온라인을 도배했다. 급작스러운 은퇴 보도의 발단은 이랬다. 이달 초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60주년 공연에서 "이번이 마지막 무대일 거라고 생각하고 무대에 올랐습니다"라고 말한 게 논란의 시작이었다.

여기에 한 종편 TV 다큐멘터리에서 털어놓은 속내가 은퇴설에 무게를 실었다. "근데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에요. 제가 알겠어요, 컨디션을. 라이브로 그렇게 몇 십곡을 한 무대에서 한다는 게 한계가 온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한계가 오기 전에 잘 마무리를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어요."

큰 무대를 앞둔 긴장감을 하소연한 것이 '은퇴 선언'으로 둔갑했다. 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한 후 쉼표가 없었던 국보급 가수가 음악 인생 마침표를 찍는다는 뉴스가 쏟아졌다. 일부 언론에 의해 '강제 은퇴'를 당한 셈이다.

최근 서울 신라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그에게 거두절미하고 은퇴설부터 물었다.

―온라인에선 '은퇴 선언'으로 나오는데.

▷은퇴가 아니다. 나의 팬이 나를 찾아주지 않을 때가 은퇴다. 내가 직접 기자회견을 하고 은퇴를 단언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60년 동안 조심하고 열심히 살아왔고, 세종문화회관 공연도 성황리에 마쳐 내 나름대로 만족했다. 그런데 이렇게 보도가 나가 속상하다. 온라인 보도에 일일이 항의할 수도 없고. 60주년 무대에서 '정말 이제 훌륭한 마무리를 해야 한다'고 말한 게 고별 무대로 와전돼서 커져 버렸다.

―그럼, 공연도 예정돼 있나.

▷6월까지 전국 투어가 이어지고 좀 쉬었다가 9월에 하반기 공연을 재개한다. 연말 디너쇼도 예정돼 있고.(60주년 전국 투어는 지난 25일 군산부터 6월 2일 광주, 6월 8일 천안, 6월 15일 광양, 6월 22일 성남, 6월 30일 울산, 9월 28일 창원, 12월 25~26일 서울까지 진행된다)

―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해 노래 인생 환갑을 맞았다. 주마등처럼 옛일이 스쳐갈 것 같은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너무 많다. 한마디로 60년 동안 이렇게 오래 사랑받아온 게 거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렵고 기쁜 걸 일일이 다 말할 수 없다. 1959년 데뷔해 1960년대 초 가장 바쁜 시기를 보냈다. 우리나라가 너무 힘든 시기였고, 그 시절 사람들의 노고를 이루 말할 수 없다. 아내는 자식과 남편을 챙기고, 남편은 식구를 먹여살리면서 절절한 시기를 보내왔다. 파독 광부들이 탄광 벽에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붙여놓고 내 노래 '동백아가씨'를 들으면서 일했다고 하더라. 그 힘으로 돈을 벌어 가족에게 보냈다. 그분들이 정말 잘사는 나라를 만든 주인공들이다. 나도 노래로 그 시기를 같이 살아오면서 조금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매일경제

―한때 평가절하됐지만 최근 다시 불고 있는 트로트 열풍에 대한 소회는.

▷내 노래는 전통가요다. 트로트와 장르가 다르다. 그것 때문에 속이 상한다. 전통가요는 일제시대 나라 잃은 설움, 6·25전쟁 때 배고픔, 타향살이에 위로로 삼은 '황성옛터' '나그네 설움' '목포의 눈물' 등이다. 그런데 요즘 트로트는 템포가 빨라서 신나게 춤출 수 있는 곡이다. 슬픈 노래도 리듬을 바꿔서 전부 춤추게 한다. 절절한 노래로 감동을 느끼게 하는 노래가 나의 노래고 또 우리 선배들의 노래가 가요 원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용과 관계없이 전통가요를 트로트 범주에 넣어 왜곡하고 있다.

―트로트 열풍의 부작용이 있다는 건가.

▷내가 공연할 때 조용하고 슬픈 노래인데도 (관객들이) 우선 박수부터 치고 본다. 그러면 노래 가사가 제대로 들리겠나. 외롭지만 혼자 발버둥치면서 60년 세월을 버텼다. '전통가요는 이거다'라고 보여주고 싶었다. '트로트의 여왕'이라 불리면 속상하다.

―그럼 어떤 수식어를 원하나.

▷전통가요 가수다. 내 대가 끝나면 없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요즘엔 젊은 사람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내 공연에 온다. 부모 자식 간 왕래가 없는 시대에 내 공연에는 가족이 보인다.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까지 온다. 첫 곡부터 끝까지 라이브로 한다. 그게 다른 공연과 다르다.

―혹시 방탄소년단 노래를 들어보셨나.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K팝 돌풍에 격세지감이 느껴지실 것 같은데.

▷방탄소년단은 너무 훌륭하고 자랑스럽다.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기록을 세웠다. 기특하고 너무 감사하다.

―선생님은 가창력과 가사 전달을 중요하게 여겨왔는데, 가창력 못지않게 칼군무를 중시하는 K팝을 어떻게 보나.

▷음악적으로는 판단을 못하겠다. 그런데 성공은 거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잘 품어줘야 한다.

―1958년 TV 콩쿠르 프로그램 '예능로터리' 가요부문 1등을 하면서 데뷔했다. 노래 실력은 집안 내력인가.

▷나는 돌연변이다. 우리 아버지도 친척도 노래 잘하는 분이 없다. 어릴 적에 지금 한남동 유엔빌리지 자리에서 살았다. 1·4후퇴 때 한강 얼음 위를 걸어서 피란할 때까지 살았다. 어머니는 일찍 아버지와 헤어지고 할머니, 작은아버지, 아버지랑 살았다.

―노래를 안 했다면 뭘 했을까.

▷노래는 천성으로 타고나야 된다. 후천적으로 노력해도 잘 안 된다. 평생 노래하라고 태어난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든다. 다른 길을 생각해본 적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기네스북에 등재될 당시인 1990년까지 발표한 음반만 총 560장, 노래는 2069곡에 달한다. 지금은 2500곡 정도 되나.

▷그렇겠다. 레코딩한 곡이 많으니까. 그 당시에는 노래 잘하면 데뷔가 쉬웠다. 작곡가 나화랑 선생님이 '예능로터리'를 보고 나를 픽업했다. 5곡을 주셨는데 거기에 '열아홉 순정'이 있었고 음반을 내기 전에 방송부터 먼저 했다. 스윙 템포로 아주 발랄한 곡이었다. 5년 흘러 1964년 '동백아가씨'가 히트 쳤고 그 후로는 슬픈 노래만 들어왔다. 내가 부르면 대박은 아니더라도 '준히트'라도 다 돼서 많은 곡을 녹음하게 됐다. 작곡가들이 1~2곡만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레코드 회사가 목욕탕 2층에 있었는데 여름에 얼음 한 덩이 갖다놓고 하루에 10곡 이상 녹음했다.

―19세부터 사회생활을 해서 친구를 사귈 시간도 없었겠다.

▷친구도 없고 밖에도 잘 안 나갔다. 취미도 별로 없고 어렸을 때 뜨개질과 수예를 하거나 책을 봤다. 집에서는 노래 연습을 전혀 안 했다. 피아노도 없었다. 손녀가 태어나서 피아노를 가르치려고 하나 샀는데 손녀가 커서 저희 집으로 가져갔다. 집안에서는 가수가 아니고 그냥 엄마다.

―그럼 노래 연습은 밖에서 하나.

▷노래 연습은 안 한다. 공연 직전에 2~3곡 불러보고 극장 오디오 체크만 한다. 발성 연습도 누가 들을까봐 안 한다. 그 모든 것이 별나게 느껴져서 그냥 있는 대로 무대에 오른다. 대신 공연에 임박하면 마음속으로 긴장을 많이 한다. 다칠까봐 계단 난간을 잡고 다니고 감기 들까봐 잘 때도 조심한다. 60주년 공연 다음날 목 주변에 좁쌀알 같은 두드러기가 났다. 긴장이 풀려서 가슴속에 응축해둔 게 터졌나보다. 몸을 가눌 수 없어 죽겠더라.

■ 된장 담그고 제사 음식도 차리는 宗婦…집에선 그냥 엄마

매일경제

1966년 발매된 이미자의 앨범 `섬마을 선생님`(왼쪽)은 이미자란 세 글자를 세상에 각인시킨 `공전의 히트곡`이었다. 오른쪽은 이달 초 세종문화회관에서 `노래인생 60년 기념 음악회`를 연 이미자의 모습. [사진 제공 = 세종문화회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늘 똑같은 몸매다. 건강 관리 비결은.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낮잠 자지 않고 군것질도 안 한다. 항상 소식하고 튀김이나 기름기 있는 음식에는 손이 안 간다.

―종부(宗婦)여서 제사 음식을 직접 차린다고 들었다.

▷된장, 고추장, 간장도 다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 그것도 하나의 인내, 절제라고 생각한다. 가수로서는 성공했지만 가정을 꾸리는 데 한 번 실패했다. (재혼 후) 이 가정에 들어와서는 성공으로 이끌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거저 되는 것은 없더라. 조그만 성공이라도 그냥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 선생님 목소리를 연구하기 위해 사후에 성대를 기증받기로 했다는 소문이 있다.

▷오보다. 이제는 무뎌져서 아니라고 발표하고 싶지도 않다.

―2002년 평양에서 한국 가수 최초로 단독 공연을 했는데 다시 북한에서 공연할 가능성은.

▷김정일이 나를 좋아했다. 동평양대극장에서 공연했는데 MBC와 조선중앙TV가 동시 생중계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다. 지금 제의가 들어오면 자신이 없다. 아마 거기까지 갈 일은 없을 것 같다.

―한번 인연을 맺으면 오래 간다고 들었다.

▷서로가 마음이 통한다면 영원하다. 20년 넘게 한 미장원과 의상실만 다닌다.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교제를 할 줄 모른다. 일 없으면 (집) 문 밖에 안 나간다.

―탈세 논란이 있었는데.

▷입에 담고 싶지도 않다. 2년 동안 정신과(병원)를 다닐 정도로 아팠다. 믿었고 베풀었던 사람에게 배반을 당한 게 제일 힘들었다. 액수를 부풀려서 고발당하니까 꼼짝을 못하겠더라. 있는 거 없는 거 모아서 해결했다. 서류상으로 따지면 잘못한 거니까(탈세 의혹은 2016년 그의 공연을 10여 년간 진행한 공연기획사가 대구지방국세청에 "이미자 씨가 공연 출연료를 축소 신고하도록 해 세금을 떠안는 피해를 봤다"고 제보하면서 불거졌다).

―한국 가요계의 산증인으로 올해 데뷔 60주년을 맞으셨는데, 기념관이나 뭔가 기록에 남길 특별한 계획들은 없으신가.

▷일본 교토에 가수 미소라 히바리 기념관에 갔는데 잘해놨더라.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없어졌다. 영구히 보존하는 게 얼마나 되나. 서울 서초구에서 산 지 내년이 30년이다. 서초구청장이 이미자의 뜰, 길을 하나 만들겠다고 제안하더라. 아직 확정 발표된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지만, 서울성모병원에서 예술의전당까지 가는 큰 길에 정원을 만들고 '동백아가씨' 노래비를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가수 이미자는… △1941년 서울 출생 △1958년 문성여고 졸업 △1959년 '열아홉순정'으로 데뷔 △1962년 MBC 10대 가수상 수상 △1964년 '동백아가씨' 발표 △1965년 첫 월남 위문공연 △1967년 무궁화훈장 수훈 △1968년 '동백아가씨' 등 앨범제작 금지 처분 △1987년 '동백아가씨' 등 10여 곡 해금 △1989년 대중가수 최초 세종문화회관 공연 △1990년 30년간 2069곡 발표로 기네스북 등재 △2009년 은관문화훈장 수훈

[전지현 기자 정리]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