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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목)

[크리틱] 업계인과 데이비드 보위 / 김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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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영준
열린책들 편집이사


추모사는 대개 겸손한 어조로 작성되기 어렵게 마련이다. 작성자가 고인과 특수한 관계였다면, 자신이 등장하는 수많은 디테일이 회상될 것이다. ‘생전의 고인을 몇번 봤을 뿐’이라면, 그 몇회의 만남이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설명될 것이다. ‘만난 적은 없다’면, 고인에 대한 새롭고 중요한 생각 몇가지를 말할 것이다. ‘사실 잘 알지도 못한다’면, 흠, 이때도 에고는 길을 찾는 데 별 곤란을 느끼지 않을 것 같다. 추모사라는 형식에는 조심성을 무너뜨리는 무엇이 있다. 이렇게 쓰고 있지만, 작성자가 스스로를 본의 아니게 부각시킨들 뭐 그리 대수냐 싶기도 하다. 읽고 나서 누가 주인공인지 알쏭달쏭한 정도만 아니면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중요한 건 고인에게 예를 표하는 것이니 말이다.

영국 팝가수 데이비드 보위가 타계했을 때 그룹 아케이드 파이어의 오언 팰릿이 쓴 추모사는 복잡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보위는 음악가가 아니었다”고 그는 썼다. “그의 위대성은 다른 데에 있었다. 음악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자산이었다.” 팰릿은 ‘음악가’가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한다. 음악가란 “박자를 잘 맞추고 음을 정확하게 짚는” 일종의 숙련된 기술자이다. 또는 악상을 “라디오에서 좋아할” 매끈한 곡으로 전개할 수 있는 감각의 소유자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은 음악가이지만(이 말은 굉장히 겸손하게 들린다), 보위는 끔찍한 음악가이거나 또는 음악가가 전혀 아니었다. 물론 팰릿은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보위에 매료된 존재라는 점을 장황하게 고백한다.

몇몇 용어나 고유명사가 바뀌어 있을 뿐, 팰릿의 논지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는 음악가를 이른바 ‘업계인’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는 업계인의 일반적인 능력을 초월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생기는 경이의 느낌을 전달하려고 애쓰고 있다. 데이비드 보위가 일반적인 의미의 음악가가 아니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는 음악계에 다른 시각을 가지고 왔다. 다른 사람이 본 적이 없는 것들을 계속 만들어냈다. 전무후무한 상업적 성공까지 거두었다. 이런 특수한 인물을 감히 업계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록 그가 수십년간 업계에서 활동하고 있었더라도 말이다. 토마스 만에 따르면 모든 개성적인 것은 이국적인 것으로 여겨진다고 하는데, 특출한 능력도 비슷한 운명인 듯하다.

보위 같은 존재들 덕분에 우리는 뭔가 대단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업계인 같지 않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익숙해진다. 이미 완전히 적응한 그만그만한 업계인의 모습으로는 뭐가 될 리가 없다고(맞는 말이다) 생각한다. 업계인 같지 않은 사람들은 당연히 외부에 있다. 이것이 외부인 영입의 논리이다. 게다가 우리는 약간의 도덕적인 이유에서 각 분야의 아마추어를 사랑하지 않는가? 외부인은 참신한 시각을 가지고 올 것이고, 이제 우리는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업계인들 모두가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그런 행복한 결말은 많지 않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출발점 자체가 외부인의 색다름이었다기보다는 특수한 인간의 탁월함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외부인을 수혈하지 말자고 말하진 않았다. 단지 아쉬운 것은, 영입할 수 있는 외부인은 사실 업계 내부인보다 더 업계에 밝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그게 애초의 취지에 맞는다. 어려운 조건이지만, 그러지 않으면 그 뒤의 모든 것이 어렵다. 역으로 업계인 역시 외부인의 시각을 가져 보려고 해야 한다. 대체로 불가능하지만 이 환상이 시작되는 데 책임이 있는 몇몇 사람은 멋지게 해내기도 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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