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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직권남용 판결로 분석한 '양승태 직권남용 적용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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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 정점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71)이 2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재판장 박남천 부장판사) 심리로 열리는 보석 심문에 피고인 신분으로 출석한다. 지난달 24일 구속된 지 한 달 만이다. 변호인단은 보석청구서에서 직권남용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법리적 주장을 펼쳤다. 형법 123조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경향신문은 박근혜 전 대통령·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김관진 전 국방부장관·배득식 전 기무사령관·전병헌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 직권남용죄가 적용된 판결 10여건을 분석해 양 전 대법원장 주장이 맞는지를 짚어봤다.

■‘재판 개입’이라는 직권은 없다?

양 전 대법원장의 첫번째 주장은 “재판 개입이라는 직권은 없다”는 것이다. 직권남용죄가 성립하려면 일단 상급자 지시가 ‘직권’에 의한 것이어야 하는데 재판 개입은 애초에 대법원장 권한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남용할 수도 없다는 취지다. 변호인단은 보석 청구서에서 “대법원장으로서 법관의 재판에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나, 그러한 권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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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달 23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영장심사가 끝난 뒤 차량에 탑승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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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검찰은 애초에 “재판에 개입할 직권은 당연히 없다”고 한다. 검찰이 직권으로 본 것은 ‘재판 개입 권한’이 아니라 ‘재판사무 등 사법행정에 대한 지휘·감독권’이기 때문이다. 직권남용의 대상은 대부분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이다. 검찰은 재판 사무와 관련해 부적절한 문건을 작성하도록 지시한 게 직권의 남용이라고 봤다.

대통령의 직권은 폭넓게 인정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사건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재판장 김세윤 부장판사)는 대통령 직권의 범위를 넓게 인정했다. 현대자동차에 특정업체와 납품계약을 맺으라고 지시한 행위는 얼핏 보면 대통령의 직권이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중소기업 지원 명목’이라는 맥락 속에서 직권으로 인정됐다. 반면 KT에 특정인을 채용하라고 요구한 행위는 대통령이 통상 행할 권한은 아니라는 점에서 무죄가 나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다스 미국 소송 검토를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에게 지시한 행위는 소송 당사자가 정부가 아닌 사기업이라는 이유에서 1심에서 무죄가 나왔지만 논란이 많다. ‘직권의 범위’를 지나치게 좁히면 하급자를 상대로 한 상급자의 부당한 지시를 처벌할 수 없게 된다는 비판이 나온다. 공무원은 위법한 지시를 거부해야 하지만 상하관계 때문에 거부하지 못했을 때 그 대한 책임이 하급자에게 부과되는 셈이다. 대법원장은 법관에 대한 인사·평정권은 물론 사법행정을 총괄하는 막대한 권한을 가진다.

■인사 불이익 없었다?

대법원에 비판적인 법관들에게 인사 불이익을 준 혐의와 관련해 검찰은 ‘물의야기 법관’ 문건 등을 작성하고 인사조치한 법원행정처 인사심의관 뿐만 아니라 인사 불이익의 대상인 판사들도 직권남용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공소장에 검찰은 “인사원칙에 반하는 인사명령을 받아 근무하게 해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하고, 법관으로서 징계처분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정직·감봉 기타 불리한 처분을 받지 않을 권리의 행사를 방해했다”고 적었다.

이에 대해 양 전 대법원장 변호인단은 보석청구서에서 “정직·감봉 기타 불리한 처분을 받지 않을 권리는 법령상 행사할 수 있는 적극적인 의미의 권리가 아니다”라며 법관들에 대한 인사불이익이 직권남용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에서는 법상 신분보장의 대상에서 제외돼있는 1급 공무원들에 대한 사직 요구가 항소심서 직권남용으로 인정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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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구속영장심사가 열린 지난달 23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구속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김창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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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공무원법은 “공무원은 형의 선고, 징계처분 또는 이 법에서 정하는 사유에 따르지 아니하고는 본인의 의사에 반해 휴직·강임 또는 면직을 당하지 아니한다”면서도 1급 공무원과 고위공무원단은 적용하지 않는다. 서울고법 형사3부(재판장 조영철 부장판사)는 이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1급 공무원 면직에서도 임용권자의 자의는 허용되지 않으며,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면직의 근거를 갖춰야 한다”고 했다. 재판부는 공무원이 정권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직업공무원제를 헌법이 보장하는 점도 근거로 들었다. 노태강 전 문화체육관광부 국장에 대한 사직 요구도 직권남용으로 판단됐다.

법원 안팎에선 “불이익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사직이나 명백한 좌천이 문제가 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달리 사법농단 사건에서는 특정 판사가 ㄱ법원에서 ㄴ법원으로 이동하는 ‘전보인사’이기 때문에 불이익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희망 순위를 검토하지 않는 등 통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불이익이 맞다고 보는 의견도 나온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판결에서 법원은 ‘개입’ 자체를 직권남용이라고 봤다.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재판장 황병헌 부장판사)는 “심의과정 등에 부당하게 개입하는 행위를 한 이상 의무없는 일이 이룩돼 범행이 기수(旣遂)에 이른 것”이라며 “일부 배제 대상자가 배제 지시와 무관하게 지원심의 과정에서 탈락했다고 해 (범죄 성립을) 달리 볼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안태근 전 검사장이 서지현 검사에게 인사 불이익을 준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서도 형사1단독 이상주 부장판사는 통영지청 전보가 ‘검찰 인사 원칙’에 어긋난다면서 직권남용이 맞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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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판사들이 잇따라 판사회의를 열어 사법농단 의혹에 대해 논의한 지난해 6월4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직원들이 로비를 걸어가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당사자 반대 직권남용 요건 아니다”

사법농단 피고인들을 옹호하는 쪽에선 지시를 받은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의 거부 의사가 없었다는 점을 부각한다.

이와 관련해 형사22부(재판장 이순형 부장판사)는 댓글 공작 지시 혐의로 기소된 배득식 전 기무사령관 판결에서 “직권남용의 상대방이 직권남용을 인식하는 게 객관적 구성요건이 된다고 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직권남용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공무원이 형식적·외형적으로 일반적 직무권한에 속하는 사항이라는 외관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지시의) 대상이 인식하지 못하고 행위를 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라는 게 재판부 판단이다.

상급자 지시의 ‘목적’에 주목한 판결도 있다. 형사23부(재판장 김태업 부장판사)는 김관진 전 국방부장관이 국군 사이버사령부 댓글공작 수사를 방해한 혐의에 관해 “국방부장관의 국방부 수사 지휘·감독권은 어디까지나 군사법경찰관의 수사권이 적절하게 행사돼 실체적 진실 발견이라는 수사의 목적이 달성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인정되는 것”이라고 했다. 사건을 축소·은폐하려는 목적으로 수사 지시를 내렸다면 이는 부당한 직권의 행사라는 취지다.

양승태 대법원이 어떤 목적으로 여러 사법농단 행위들을 벌였는지는 모두 당시 작성된 ‘문건’에 빼곡히 기재돼 있다.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국회의원을 압박해야 한다”, “청와대 설득을 위한 이니셔티브가 필요하다” 등이다.

변호인단이 보석청구서에서 지난해 12월7일 선고된 형사31부(재판장 김연학 부장판사)의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1심 판결을 인용하면서 직권남용죄를 둘러싼 논란은 커지고 있다. 이 재판부는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위법한 지시를 했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직권남용이 있었는지를 다시 따져야 한다면서 우 전 수석의 부당한 지시 상당 부분을 무죄로 봤다. 직권의 범위, 지시 경위, 목적 및 그 내용, 하급 공무원이 위법성을 인식했는지 여부, 위법성의 정도, 직무수행으로 인한 결과 및 이익의 귀속 주체 등의 요건도 제시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부당한 직무집행인데도 불구하고 직권남용죄의 범위를 지나치게 좁게 해석해 형사처벌을 면해줄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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