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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ESC] 비만과 광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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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영의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눈치 안 보고 퇴근하는 나

알고 보면 소심한 사람

자유 시간 많은 방학 좋았지만

반대로 공허함에 병증마저 생겨

입시 때도 비슷한 것 경험

해결책은 과자와 아이스크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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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오늘도 나는 오후 6시가 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23년 차 팀장부터 7년 차 오 대리까지 아무도 퇴근하지 않았지만, 심지어 그 누구도 일어날 기미도 없었지만 괜찮다. 나는 계약된 시간 동안 계약된 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이니까. 심지어는 미국인처럼 근무한다고 ‘마이클’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으니까. 다들 내가 이런 사람인 것을 알고 있고, 점심도 회식도 같이하지 않는 나를 사회생활(의 정확한 사전적 정의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능력이 낙제점인 별종 말종 취급하고 있다. 여차하면 회사를 때려치우겠다고 마음먹은 뒤로는 모든 게 편해졌다.

거짓말이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 이렇게 주절주절 많은 생각을 할 리가 없지. 놀부 같은 생김새와는 어울리지 않게 실은 나는 조금 소심하고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성격이다. 단지 글쓰기가 본업이며, 회사 일이 부업이라는 마음을 갖기로 했을 뿐이다. 결심은 결심일 뿐이고 성격은 또 성격이라, 눈치는 눈치대로 다 보고, 염치없어할 것을 다 염치없어하면서도 기어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야 만다. 상상도 못 할 만큼의 내적 에너지를 써가며…. 사무실 문을 열 때까지 뒤통수가 간질간질하고, (어차피 무릎관절을 위한 기능성 구두라 굽 소리 따위 나지 않음에도) 괜히 발소리를 죽이게 되고, 오래된 사무실 문은 너무 큰 마찰음을 내는 것 같다. 누군가 나를 불러 세우는 환청을 느끼며 나는 문이 닫히기 무섭게 건물 밖으로 질주했다.

거리에 나설 때만 해도 오늘은 기필코 운동을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헬스장이 가까워져 오자 가방끈을 꽉 잡고 있던 손이 느슨해져 갔다. 어제도 빠졌으니까 오늘은 꼭 가야 하는데. 근데 뒷목이 왜 이렇게 뻐근하지? 허리는 또 어떻고. 오늘 업무가 좀 빡세긴 했어. 이렇게 경직되고 피로한 상태에서 운동을 하면 다칠 확률이 높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아. 효율이 떨어지고 근손실도 심할 게 분명해. 일주일은 7일이고 그중에서 딱 사흘, 사흘만 운동을 하면 되니까 오늘 정도는 재껴도 돼. 내일이 있잖아? 그렇고말고.

나는 방향을 선회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갑자기 가방이 가벼워진 것만 같고 아팠던 목도 가뿐했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가 나왔다. 운동도 하지 않았으니까 오늘은 기필코 야식을 먹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퇴근 버스에 올라탔다.

당연히 버스는 만원이었다. 겹겹이 껴입은 옷으로 땀이 배어드는 것만 같고, 손이 안 닿는 엉덩이골이며 등이 자꾸 간지러운 것만 같고. 숨을 못 쉬겠어. 아 정말이지. 사람이 싫다. 서울 사람들 중 사람을 진심으로 싫어해 보지 않은 사람이 존재할까? 사람이 싫은데 왜 배는 고프고 난리일까. 몇십분 동안 만원 버스에서 시달리다 간신히 정류장에 내렸다. 마을버스로 환승하면 집 앞까지 갈 수 있지만 또다시 사람들 틈에 낄 자신이 없어 그냥 걷기로 한다. 어차피 운동을 쉬었으니까 이 정도는 걸어줘야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느릿느릿 집을 향해 걷는데 자꾸만 배달 앱이 눈에 밟혔다. 몇 번이나 지웠다가 새벽마다 다시 깔곤 했던…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오늘 스트레스가 심했나. 퇴근 전에 단백질 파우더까지 마셨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더 이상의 칼로리 섭취는 제한되어야 마땅한데, 분명 배가 고픈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내 몸은 자꾸만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는 마음이 공허하달까. 달력 앱을 켠 나는, 매일 매일 적어놓는 (다짐이나 다름없는) 계획을 읽어 내려갔다.

“하루 칼로리 1300 이하로 제한. 근력 한 시간, 유산소 50분 이상. 원고 5매 이상 작업.”

점심에는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짠 멸치국수를 먹어 치워버렸고, 근력도 유산소도 하지 않았으니 오늘 하루도 다 망친 것이나 다름없군. 다른 모든 날들처럼. 그래도… 괜찮다. 나는 이런 내가 익숙하니까.

계획적으로, 계획을 지키며 사는 삶이란 어떠할까.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내 삶에 있어서 계획대로 이뤄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태생적으로 게을러터진 나는 방학을 아주 사랑하면서도 괴로워하는 아이였다. 지긋지긋한 학교에 가지 않으니 좋기는 했지만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할 일을 만들고, 계획에 따라 사는 데 탁월하리만치 소질이 없던 나는 언제나 소파에 누워 어영부영 티브이(TV)나 보며 시간을 때우기 일쑤였다. 그렇게 공허한 하루를 보내고 잠들기 위해 누우면 천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천장뿐만이 아니라 하늘이, 세상이, 나아가 내가 견뎌야 하는 내일이, 나의 인생이 내 온몸을 통째로 짓누르는 것 같은 기분. 심장이 빨리 뛰고, 귀에서 고음의 사이렌 소리 같은 이명이 들리기 시작하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간을 지체하면 고음이 더 커지고 심장이 옥죄는 듯한 통증을 느끼게 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차가워진 손을 주무르며, 침대맡에 앉아 새벽까지 책을 읽다 기절하듯 잠드는 것이 습관으로 굳었다.(덕분에 지금 이런 삶을 살게 된 것이겠지) 그렇게 잠을 설치고 난 다음 날은 어김없이 늦잠을 잤고, 또 소파에 피곤한 몸을 누인 채 좀비처럼 텔레비전을 보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통째로 방학을 잠과의 투쟁으로 날리고 나면, 차라리 생활 리듬을 억지로라도 만들어주는 학교가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남들도 다 이렇게 사는 줄 알았지.

이런 나의 증상이 조금은 특별한 병증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그 무렵, 대한민국의 다른 모든 입시생(이를테면 <스카이캐슬>의 예서)처럼 한계를 뛰어넘는 압박과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나는 점점 더 증상이 심해졌는데, 특히 수시 입학고사에서 그 정점을 찍어버렸다. 나 때만 해도 수시 1학기 제도가 남아 있을 때였고, 지원 대학 개수에도 제한이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답답한 고향과 입시 지옥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나는 서울 시내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대학에 원서를 냈고, 그 모든 대학의 대학별 고사를 치르러 갔었다. 문제는 시험 전날이면 단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밤새 이명을 듣거나, 얕게 잠들었다 악몽을 꾸며 30분 만에 깨어나곤 했던 것이다. 입학시험이 몰린 주에는 일주일 동안 연속극처럼 이어지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흰옷을 입은 사람이 도끼를 들고 날 쫓아오고 나는 전 세계를 끊임없이 달리고 또 달리고….) 친구들 중 몇몇 예민한 아이들은 잠을 설치기도 했으나, 나처럼 지속적이고 병적으로 모든 시험 전날마다 어김없이 불면과 이명, 심장 통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래도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나는 부모님에게 에스오에스(SOS)를 쳤고, 결국 그들의 손에 이끌려 대학병원에 가게 됐다. 심장내과와 신경외과를 거쳐 내가 최종으로 가게 된 곳은 정신건강의학과(당시 정신과). 몇 번의 심리검사와 혈액검사, 심전도 검사 끝에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전문의가 내게 붙여준 진단명은 ‘양극성 장애’였다. 전문의의 호출로 부모님이 병원을 찾았고, 우리 가족 셋 모두가 약물치료를 동반한 상담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부모님은 자신들과 나의 치료를 거부했다. 정신과 진료 기록이 남으면 향후 인생에 좋을 게 없다는 50년대생다운 (무지에 기반한) 편견과 더불어, 지난 인생 동안 지속해온 사고의 구조를 바꾸고 싶지 않다는, 그러니까 자신들의 인생에 산재한 문제를 직면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섞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일방적으로 치료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던 그날 밤, 내 몸을 짓누르는 천장의 무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웠다.

넓은 세상 긴 인생 속, 완벽히 홀로 남겨진 기분.

얼마 후, 나는 자력으로 내 증상을 이겨낼 치료제를 찾았다. 박스 과자와 파인트 사이즈의 아이스크림. 내게도 위안거리가 필요했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술도 담배도 아니고, 주전부리일 뿐이잖아. 그 무렵부터 나는 집에 들어오기 무섭게 〈프렌즈〉나 〈섹스 앤드 더 시티〉 같은 미국 시트콤을 틀어놓고 집 안에 쌓아둔 과자들을 먹는 습관을 들였다. 그 순간은 하루 중 유일하게 내 마음이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물론, 그때의 그 선택이 이 모든 궤적의 시작이 될 줄은 몰랐다. 정말, 꿈에도 몰랐다.

고등학교 3학년 끝자락, 나는 열 번도 넘는 낙방 끝에 간신히 서울에 있는 한 대학에 합격했다. 이전보다 15킬로그램이나 찐 몸무게로 상경해, 1학기가 끝나기 전에 그 살을 모조리 뺐다. 그러다 술을 먹으며 다시 살이 쪘고, 거울에 접힌 뱃살이 보이기 시작하면 또다시 굶기 시작하고…. 그동안 내가 찌고 뺀 살의 무게를 합하면 족히 200킬로그램이 넘을 것이다.

평소에 나는 먹는 양이 많지도 않고 (위가 좋지 않아 많은 양을 먹지 못한다) 행동이 굼뜬 편도 아니고, (띄엄띄엄) 교양 차원에서 운동까지 하고 있다. 그런 나를 두고 친구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넌 자기 전에 폭식만 안 하면 돼.”

알아. 안다고. 누가 몰라.

서른한 살의 내게 발견된 만성질환은 추간판 탈출증과 위염, 역류성 식도염, 과민성 대장염과, 양극성 장애까지 모두 다섯이다. 회사 생활 2년 차가 넘어가면서부터는 증세가 악화돼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기 시작했다. 아침 약과 저녁 약을 합하면 총 14알. 약을 먹고 난 뒤로 또다시 10킬로그램이 넘게 찐 걸 생각하면 그때의 그, 부모님의 판단이 맞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내 피부 타입은 남성중에서는 드문 건성인데, 얼굴만이 아니라 온몸이 좀 건조한 편이다. 건조한 손톱 주변엔 거스러미가 잘 일어나, 언제나 손톱깎이를 침대맡에 두곤 한다. 아침이면 밤새 일어난 거스러미를 잘라낸다. 생살이 들려 피가 나지 않게. 약을 먹는 것은 그것과 같다. 오늘도 나는 14알의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웠다. 내가 버티고 겪어온 이 모든 일이 고작 이런 인생을 위해서였다는 생각을 하면 한없이 쓸쓸해진다. 그리고 나는 핸드폰 속 배달 앱을 누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중이다. 지금 음식을 시키면, 한 시간은 더 늦게 자야 하고, 보나 마나 밤새 위산이 역류할 테고, 어쩌면 회사에 지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럼 분명히 내일 하루의 컨디션을 모두 망치게 될 것이다.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으니까 나는 또다시 억지로 눈을 감았다. 오늘 밤은 기필코 굶고 자야지 마음먹으며.

한겨레

박상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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