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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장편 ‘문신’ 출간 윤흥길 “경박단소 시대 역주행, 묵직한 작품도 공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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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 신분확인용 문신 풍습 바탕

일제말 민족 정체성 위기 극복 담아

“타고난 문학적 재능은 모자라지만

문장·어휘 등 그간의 역량 쏟아부어”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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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소설의 경향을 경박단소(輕薄短小)라 요약할 수 있을 듯합니다. 가볍고 얕고 짧고 작은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어 문학을 왜소화·궁핍화시키고 있어요. 제 이번 작품은 어떤 점에서는 시대를 역주행하는 소설입니다. 글로벌 시대 한국인의 정체성 문제를, 우리가 거쳐온 일제 말이라는 과거를 배경으로 다뤄보았습니다.”

<장마> <완장>의 작가 윤흥길(76)이 신작 소설 <문신>을 내놓고 11일 낮 서울 시내 한 음식점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장편으로는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이후 21년 만인 이 작품은 모두 5권 분량인데, 세 권이 먼저 나왔고 4·5권은 내년 상반기 중에 나올 예정이다.

<문신>은 전라도 산서의 대지주 최명배와 그의 딸 순금, 아들 부용·귀용, 조카 최진용과 배낙철 등을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 말 민족 정체성의 위기와 그 극복을 위한 몸부림을 그린 소설이다. 제목은 예전부터 전쟁에 나아가는 남자가 죽을 경우 신분 확인을 위해 몸에 문신을 새기던 ‘부병자자’(赴兵刺字)의 풍습을 가리킨다. 소설 2권에 나오는 아래 대목은 제목과 소설 주제를 아울러 담은 셈이다.

“불행과 비극으로 점철된 역사의 험준한 고빗사위들이 고향과 가족들 두고 멀리 떠날 수밖에 없는 젊은 남정들 신체에 입묵된 부병자자 하나하나에 돋을새김으로 강조되어 있는 듯싶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틈타 천석꾼 대지주가 된 최명배는 산서 땅의 황제처럼 군림하며 탐욕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맨 위 자식인 외동딸 순금은 전주에서 고등교육을 받았으나 약혼자의 죽음으로 본가로 돌아온 뒤 홀로 기독교에 귀의해 난세를 넘어가고자 한다. 둘째인 큰아들 부용은 고등교육을 받은 수재이지만, 자신보다 뛰어난 사촌 배낙철에 대한 열등감과 폐결핵이라는 지병에서 비롯된 냉소로 세계와 대면하기를 회피한다. 둘째아들 귀용은 경성의 명문학교에 유학 중 사촌형인 사회주의자 배낙철의 감화를 받아 아버지를 상대로 한 ‘화적질’에 가담한다.

“일제 말기는 민족 정체성의 최대 위기 시대였습니다. 창씨개명과 내선일체, 동조동근이라는 정책과 교육으로 민족 정체성이 말살될 정도로 위기 상태였죠. 제가 다루고자 하는 소설 주제에 가장 적합한 시기가 그 무렵이라고 보았습니다.”

작가는 원래 <문신>을 10권 규모의 대하소설로 구상했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평소 ‘큰 소설을 쓰라’고 당부하신 말씀에 자극을 받아서였다. 일제 말 조선과 일본 홋카이도 및 사할린의 강제 노동, 그리고 해방공간에서 6·25까지 이르는 3부작 편제였다. 소설을 위해 홋카이도 탄광 취재도 마쳤다. 그러나 연재하기로 했던 문예지가 두번이나 폐간되는 등 곡절을 거치면서 배경과 규모를 줄였다. “대하소설이 아니라 중하(中河)소설쯤 된다”고 그는 <문신>을 가리켜 말했다.

“‘큰 소설’이 반드시 분량이나 길이를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어요. 인간과 사회에 중요한 주제를 치열하게 다루는 작품을 말씀하신 거였죠. 선생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 소설 출간을 무척 기다리셨을 텐데 아쉽습니다.”

작가는 “주제와 함께 문장과 어휘, 수사법 등에도 공을 많이 들였다”고 소개했다.

“전라도 판소리의 정서와 율조에 가깝도록 문장을 쓰려 했습니다. 독자들 눈치 볼 것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그간 쌓아온 내 문학적 역량을 다 쏟아붓겠다는 생각으로 썼어요. 나이도 있고 해서 앞으로 이런 시도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겠죠.”

“제딴은 흉당 안에 팥죽 끓듯 육도삼략이 들끓고 있노라 자부할지 몰라도 겉보기로는 된서리 맞고 시르죽은 율모기처럼 맥없이 느껴지는 지질컹이라고 치부해 나온 진용이었다” 같은 문장, “호강에 잣죽 쑤는 셈 치고” 같은 표현, 문문, 관디벗김, 덧게비치다, 몬존한 같은 낱말들에서 문장에 들인 작가의 공력을 확인할 수 있다.

반세기 전인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는 “타고난 문학적 재능은 모자라지만 그것을 보완할 만한 지구력과 뚝심, 체력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다”며 “다양한 크기와 주제를 지닌 소설이 공존하는 쪽으로 문학 풍토가 바뀌었으면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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