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7 (금)

[이진숙의 휴먼 갤러리](17)예술도 세계도 움직이는 사람만이 제대로 볼 수 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베르니니 ‘보르게세 추기경’

경향신문

보르게세 추기경의 흉상(1632)은 보는 각도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정면에서 보면 능수능란한 행정가의 면모가 두드러지지만 옆에서 보면 열정적이면서도 세련된 안목을 가진 예술애호가의 표정을 볼 수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너는 로마를 위해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로마는 너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여덟 살의 한 소년이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에게 칭찬을 들었다. 칭찬은 소년의 꿈과 야망이 되었고, 시간이 지나 그 모든 것은 이루어졌다. 소년의 이름은 바로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1598~1680). 회화, 조각, 건축, 인테리어 등 모든 분야에서 다재다능한 종합예술가로 성장해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이다. 베드로 무덤의 캐노피, 베드로의 권좌, 교황 우르바노 8세의 무덤, 교황 알렉산드르 7세의 무덤 등 바티칸의 최종 내외관도 모두 그의 완성품이다. 이뿐 아니라 나보나 광장의 ‘네 개의 강 분수’, 바르베리니 광장의 ‘꿀벌 분수’, 산타 안젤로 다리 위의 ‘천사조각들’ 등 로마 곳곳에서 그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전성기의 베르니니는 자신의 성공을 예언한 추기경 보르게세의 모습을 흉상으로 남겼다. 보르게세는 교황 바오로 5세의 조카로 당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동시에 탁월한 예술적 안목을 가졌으며, 화가 카라바조와 베르니니의 최고 후원자이기도 했다.

베르니니의 작품은 흉상에 대한 상식을 뛰어넘는 매력을 담고 있다. 조각은 원래 회화보다 본질 지향적이고 영웅 지향적이다. 대리석, 나무, 청동 등 오래 보존되는 값비싼 재료로 만들어지는 인물은 그 재료에 값하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가진 고귀한 인물이어야 하며, 작품은 그 인물의 영원한 영웅적인 본질을 표현해야 한다. 영원함을 지향하기에 대개의 고전 조각품들은 변화무쌍한 순간적인 감정에서 벗어난 무표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17세기의 예술가 베르니니는 순간의 미묘한 표정을 담아내는 조각품을 만들었다. 영원에서 순간으로, 정지에서 운동으로의 전환이 베르니니가 바로크 예술에 각인한 중요한 특징이다.

여느 것과 다른 ‘보르게세 흉상’

권위 대신 살짝 방심한 듯한 얼굴

각도에 따라 미묘한 표정 변화는

보는 게 아니라 만지는 느낌을 준다


엄숙한 권위를 보여주는 일반적인 흉상과는 달리 보르게세 추기경의 흉상은 그가 살짝 방심한 듯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몸은 정면을 향하지만, 얼굴은 오른쪽 위로 약간 틀었고, 입도 살짝 벌어져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얼굴을 정면에서 보면 단호하면서도 능수능란한 행정가의 면모가 두드러지지만 옆에서 보면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듯한 열정적이면서도 세련된 안목을 가진 예술애호가의 표정을 볼 수 있다.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미소를 두고 슬프게도 보이고 기쁘게도 보이는 신비한 미소라고 말하는 것처럼, 각도에 따라 추기경의 표정은 조금씩 달라 보인다.

이 미묘한 표정 변화를 보이는 인물이 원래는 그저 한 덩어리의 대리석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순간, 경이로움은 더욱 커진다. 베르니니는 조각가였던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는데 특히 돌을 다루는 솜씨가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이 <미술사의 기초 개념>에서 ‘보르게세 추기경’을 극찬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가촉성’ 때문이었다. 눈으로 보고 있는데 만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는 의미에서다. 시각이 촉각으로 전환되며 조각의 원재료인 대리석을 넘어 대상의 실재를 만지는 느낌이 든다. 영양 상태가 좋은 피부의 느낌, 색채가 조금도 표현되지 않았지만 광택감이 도는 비단옷을 만지고 있는 듯한 느낌 말이다.

인물의 영웅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조각품들은 대부분 굳게 입을 다물고 정면을 바라봄으로써 스스로를 영웅적 엄숙주의에 가둔다. 반면 추기경은 지금 우리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살짝 벌리고 있다. 살짝 위로 치켜뜬 눈빛은 생동감 있게 반짝이는 것처럼 보인다. 살짝 벌린 입과 풍부하게 파인 눈은 빛에 따라 그늘을 만들기도 하며, 조각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빛’이라는 매우 가변적이고 우연적인 조건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이 조각품은 미세하게 움직이는 듯, 지금 여기서 살아 숨 쉬는 듯 느껴진다. 사실 베르니니의 추기경 흉상은 두 점이다. 그는 첫 번째 작품을 완성한 뒤 연마 과정에서 돌 자체의 결함으로 이마에 금이 간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음을 발견하고, 아주 빠르게 두 번째 버전을 완성했다. 그러나 금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첫 번째 작품에는 생동감이 넘친다.

■ 영원에서 순간으로, 정지에서 운동으로

경향신문

베르니니의 ‘다윗상’(1623~1624)은 한 순간에 한 측면밖에 볼 수 없다. 얼굴을 정면으로 보면 어깨가 틀어져서 한쪽 팔밖에 보이지 않고, 어깨를 중심에 두면 얼굴과 한쪽 다리가 보이지 않는다. 관람객은 작품을 돌면서 보아야 한다. 전체 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방향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기억하고 종합해야 한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베르니니의 ‘단일 시점 붕괴’

그가 만든 드라마틱한 다윗상은

당시 항해 끝 신대륙을 발견했듯

움직이며 단편을 종합해 봐야 했다


영웅주의적인 엄숙함을 벗어나 조각에 가변성과 우연성을 도입한 점은 베르니니의 큰 업적 중 하나다. 이를 통해 바로크 조각의 특징인 ‘단일 시점의 붕괴’가 도래했다. 르네상스 시대처럼 고정된 장소에서 한눈에 대상의 전모를 볼 수 있던 시대는 지나갔다. 관람객은 스스로 움직이면서 작품을 감상하고, 부분을 종합해 전체를 떠올릴 수 있게 됐다. 이것이 가능한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베르니니의 ‘다윗상’이다. 작고 어린 다윗이 거대한 골리앗을 물리치는 주제는 신생 르네상스가 1000년의 중세를 극복한다는 의미로 해석되면서 거장들이 끊임없이 도전하는 소재가 다윗이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 중에 어떤 장면을 뽑아낼 것인가가 시대정신에 따라 각기 달랐을 뿐이다.

1504년 미켈란젤로가 만든 다윗은 르네상스 특유의 중용적인 평온함을 유지하는 가운데 승리를 위해 다시 한번 결의를 다지며 관람객 앞에 당당하게 서 있다. 반면 베르니니는 다윗이 돌팔매를 던지고 있는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을 포착했다. 그는 행동 중이고, 그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미켈란젤로의 다윗은 피렌체 시청 건물 앞 광장에 세워 둘 것을 염두에 두고 제작되었기에 정면에서 보아야 온전한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튀어나온 앞머리도, 입만큼이나 큰 눈도 4m 가까이 되는 조각품을 아래에서 위를 쳐다볼 때 생기는 원근법적인 축소를 고려해서 제작되었다. 미켈란젤로가 설정한 관람객은 다윗의 위용과 아름다움에 감동해서 몸이 굳은 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관람객일 것이다. 원근법적으로 설정된 인간은 ‘지금, 여기’라는 하나의 장소와 시간에 결박된 인간이었다. 한곳에 서서 소실점을 기준으로 세상의 한곳(소우주)을 보며 세계의 전부(대우주)를 볼 수 있다고 믿었던 이상적인 르네상스인은 이제 사라졌다. 세계가 커졌기 때문이다.

베르니니가 설정한 관람객은 움직이는 관람객이다. 베르니니의 다윗상은 한 순간에 한 측면밖에 볼 수 없다. 얼굴을 정면으로 보면 어깨가 틀어져서 한쪽 팔밖에 보이지 않고, 어깨를 중심에 두면 얼굴과 한쪽 다리가 보이지 않는다. 관람객은 작품을 돌면서 보아야 한다. 전체 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방향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기억하고 종합해야 한다. 움직이면서 단편을 종합하는 관람객은 스스로 세계를 구성하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전체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는 불안한 인간이다. 그렇게 하나의 고정된 시점으로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던 시대는 지나갔다. 움직이는 자만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16~17세기 내내 유럽인들은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세계를 파악했다. 앞서 1519년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마젤란은 세계일주를 떠났다. 과거의 관념은 지속적으로 부정되었다. 오로지 인도를 발견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혔던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하고도 인도를 발견했다고 우겼지만,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4회의 걸친 항해 끝에 그것이 전대미문의 신대륙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7세기 천문학과 항해술의 발전으로 서구인들은 지금까지 가보지 못했던 세계를 탐험했고, 그렇게 얻어진 경험적이고 부분적인 상을 지도에 더하면서 세계지도를 완성해가던 시절이었다. 신대륙의 다양한 동식물들이 유럽에 소개될 때마다 그것들이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유럽인들은 당황했다. 세계의 확장과 인식의 확장으로 과거의 관념이 깨져 나가고 지식이 불안을 가져오던 시대가 17세기였다. 상황은 변화했고, 과거의 관점으로 세상은 설명되지 않았다. 새로운 관점을 얻기 위해 부단한 운동이 필요했던 시점이다. 세상이 변화하면 관점이 달라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 권력도 머물지 않는다

신·구교 대립하던 30년이 지나고

신은 세속왕의 권력으로 대체됐다

예술도 왕을 찬양하는 미술로 전환

바로크는 그 유행이 지나버렸다


세상은 요동치며 변화하고 있었고, 영원한 것은 없었다. 세계가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유럽 내부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30년간 유럽은 구교와 신교로 나누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렀다. 신교는 화려한 교회 미술 치장을 비판했지만, 구교는 가톨릭교회야말로 천국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 되길 원했다. 이것이 17세기에 교회 바로크 미술을 탄생시킨 강력한 원동력이었다. 베르니니는 이런 요구에 부응해서 건축, 조각이 하나의 스펙터클로 어우러지는 바로크 환영주의(illusionism)를 최정점에 끌어올린 예술가다.

베르니니의 손에 의해 완공된 성 베드로 성당 광장의 열주는 성당 쪽으로 걸어오는 순례객에게 팔을 벌려 환영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먼 길을 걸어온 순례객에게 시원한 그늘의 위안을 제공한다. 그중 ‘성 테레사의 황홀경’은 회화, 조각, 건축의 완전한 종합을 이루어낸 작품으로 꼽힌다. 그런데 성녀 테레사의 종교적 황홀경은 육체적 쾌락과 닮아 있어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 아우러지는 ‘영육적 체험’이라는 표현을 가능케 했다. 정면에 서서 보는 관람객에게는 보이지 않는 창이 위에 있어서 빛이 화살을 든 천사와 성녀 테레사의 황홀경을 비추도록 했다. 베르니니를 통해서 건축물은 머무는 장소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바라보고 상상하며 체험하는 극장이 되었고, 조각은 건축물과 함께 황홀한 종교극을 연출하는 배우가 되었다. 기적은 연극이 되고, 교회는 극장이 되었다.

사실 신앙을 위해서 더 강력한 시각적인 매체가 요구된다는 것은 세속화가 더욱 가열차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지 않고 믿는’ 행복의 시대는 지나갔다. 모든 것은 증명되고 보여야만 되는 시대다. 신의 영광도 눈앞에서 시연되는 것 같은 강렬한 환상을 펼쳐내야 하는 시대였다. 1648년 ‘30년 전쟁’을 종결하는 베스트팔렌조약으로 1종교 1국가의 원칙이 정립되면서 신교와 구교는 공존을 택했다. 이제 가톨릭의 보편성은 사라지고 민족국가의 국경이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군소도시로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는 힘을 잃었다. 신이 권력을 부여했다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는 무소불위의 세속의 신들은 왕이라고 불렸다. 그러니 30년 전쟁의 최종 승자는 신교도 구교도 아닌 세속왕이라 할 만하다.

경향신문

루이 14세의 흉상(1665). 풍성하고 섬세한 가발의 곱슬거림과 바람을 타고 나는 듯한 단면 처리는 루이 14세를 신과 같은 이미지로 만들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665년 노년의 베르니니는 루이 14세의 부름을 받고 프랑스에 갔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기대만큼의 환대를 받지 못했고, 루브르 궁전을 증개축하는 과정에서는 ‘너무 이탈리아적’이라는 불평까지 들어야 했다. 결국 그는 증개축에서는 손을 떼야 했지만, 젊은 왕의 흉상을 제작하는 기회를 얻었다. 풍성하고 섬세한 가발의 곱슬거림과 바람을 타고 나는 듯한 흉상의 단면 처리는 왕을 신과 같은 이미지로 만들어줬다. 실제로 ‘태양왕’이라 불렸던 루이 14세는 아폴론 신과 비교되는 것을 좋아했다. 이는 미술이 절대권력을 지닌 왕들의 취향에 좌우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신의 영광을 찬양하던 미술이 왕의 권력을 찬양하는 미술로 전환되면서 17세기 중반 이후의 궁정 바로크 미술이 발전한다. 18년간의 대공사 끝에 완성된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잘리고 다듬어진 베르사유의 정원 식물들을 보고 생시몽 백작은 회고록에서 나무 한 그루 제멋대로 자라지 못하는 이 정원은 ‘조신들을 침묵하게 하기 위한 정치적 게임’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다시 분위기는 질서를 숭배하는 방향으로 바뀌었고, 베르니니의 역동적인 조각작품들은 유행이 지난 것으로 치부되었다. 심지어 이후 18세기 고전주의 미학의 결정적인 기초를 놓은 빙켈만은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 바로크 조각에 관하여, “해괴한 윤곽이여!”라며 경멸을 내뱉었다.

■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경향신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보르게세 미술관: 지난주에 소개했던 보르게세 미술관에는 이번 글에서 중요하게 언급한 베르니니의 ‘다윗상’도 소장되어 있다. 중요한 미술관이기에 한번 더 소개한다.

■ 필자 이진숙

경향신문

서울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러시아 여행을 하며 트레차코프 미술관에서 만난 작품들에 큰 감명을 받아 미술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모스크바의 러시아 국립인문대학 미술사학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롤리타는 없다 1, 2> <시대를 훔친 미술> <위대한 미술책> 등 저서가 있다.


이진숙 | 미술평론가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카카오 친구맺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