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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기억할 오늘] 샌드라 데이 오코너(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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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미국 첫 여성 연방대법관 샌드라 데이 오코너.


미국 첫 여성 연방대법관 샌드라 데이 오코너(Sandra Day O’Connor, 1930~)가 1981년 9월 21일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낙태를 허용한 연방대법원의 73년 판결(Roe v. Wade)을 둘러싼 찬반 공방이 여전히 끊이지 않았고, 낙태에 대한 입장이 법관의 정치적 입장을 가르는 기준처럼 통용되던 때였다.

텍사스에서 태어나 아리조나에서 성장했고, 공화당을 기반으로 주 정부와 법원ㆍ검찰에서 이력을 쌓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지명으로 청문회장에 선 그도 낙태 심판을 비껴갈 수 없었다. 오코너는 70년 아리조나 주 형법(낙태 처벌법) 폐지 법안에 찬성했던 낙태 찬성론자였다. 그는 대통령에게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변을 회피했고, 상원의원들의 집요한 질문에도 찬반의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서 ‘낙태는 개인적으로 불편한 선택’이라는 식의 원론적인 답변으로 우회하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그가 대법관이 되고 2년이 지난 83년 뉴욕타임스가 한 사설에서 “nine men of the SCOTUS(Supreme Court of the US)”라는 관습적인 표현을 썼다고 한다. 그는 편집장에게 항의 편지를 썼다. 그는 미 연방대법원은 9명의 ‘men’으로 구성돼있지 않다며 자신을 ‘FWOTSC(First Woman On The Supreme Court)’라고 소개했다. 그는 자신의 성취에 대한 자부심과 공적인 책임감 외에 여성으로서의 책임감도 느낀다고 말하곤 했다. 오코너는 선출직 검찰과 주상원의원 등을 역임한 준 정치인이기도 했다. 스탠퍼드대 로스쿨을 3등으로 졸업했다는 말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가 졸업하던 52년의 스탠퍼드대 로스쿨은 졸업등수라는 걸 매기지 않았다고 한다. 여성이어서 캘리포니아에서 로펌 취직이 어렵자, 한 로펌으로부터 법무 비서직 제안을 뿌리치고, 보수도 사무실도 없는 주 산마테오 카운티의 검사보로 법조 이력을 시작한 일화도 있다. 대법관으로서 그는 범 보수진영으로 분류됐지만, 엄밀히 말하면 캐스팅보트를 쥔 중도였다.

오코너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게 된 남편의 곁을 지키기 위해 2006년 은퇴했다. 이듬해 외신은 기억을 잃은 그의 남편이 요양시설에서 만난 다른 여성 환자와 사랑에 빠졌고, 오코너가 그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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