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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흔들리는 車 생태계… 협력사부터 부도,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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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출 1000억원 규모인 현대·기아차의 2차 부품사 E사는 지난 12일 만기가 돌아온 어음을 막지 못하고 부도를 냈다. 경북 경산에서 고무 부품 등을 만들던 이 회사는 연간 30억원 수준의 영업이익을 냈다. 그러나 국내 자동차 생산이 2년 연속 고꾸라졌던 지난해 매출이 832억원으로 뚝 떨어지며 8억원의 적자를 냈다. 이후 수개월간 직원 월급을 주지 못했고, 결국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1800억원의 매출을 올리던 현대·기아차 1차 협력사 리한도 지난달 산업은행에 워크아웃(기업구조개선)을 신청했다.

경북 경주에 있는 또 다른 현대·기아차 2차 협력사인 A사는 지난 4월 플라스틱 부품을 만드는 금형 230여 벌 중 150벌을 납품처인 1차 협력사에 반납했다. 동시에 생산 인력 36명 중 40%인 14명을 해고했다. 지난 7년간 매출의 15% 정도인 10억원대 적자를 내면서도 근근이 버텨 왔지만, 올해 최저임금이 전년보다 16.4% 오르자 손을 든 것이다.

한국 제조업의 총아인 자동차 산업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국내 완성차의 수출·내수 동시 부진이 2년 연속 지속되면서 5개 업체의 1차 협력사 800여 곳, 8000여 곳에 달하는 2·3차 협력사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다. 실제 1차 협력사 800여개 중 상장사 50개사의 재무제표를 보면, 이 중 절반 가까운 23개사가 올해 1분기에 적자 전환했다.

30여년간 자동차 산업을 연구해온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중견 협력사들이 영업 부진으로 무너지는 것은 1998년 외환 위기 이후 처음"이라며 "2008년 금융 위기도 버텼던 자동차 생태계가 업황 부진과 인건비 상승, 무역 전쟁까지 겹치며 아래부터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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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아차에 섀시 등을 공급하는 1차 부품사 화신은 2013년 663억원, 2014년 411억원의 영업이익을 낸 탄탄한 회사였다. 직원 수는 1000여명에 달한다. 그러나 지난해 중국 사드 타격과 미국 수출 부진으로 지난해 2분기부터 4분기째 적자를 내고 있다. 이 기간의 누적 적자는 418억원에 달한다. 화신 관계자는 "매년 20~30명을 신규 채용했는데, 올해는 채용 안 하는 걸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한국 자동차 제조업(완성차·부품)이 직접 고용한 인원은 지난 6월 기준 39만1000명이다. 작년 12월 40만명에서 매달 감소해 9000명이 줄었다. 자동차 산업은 주유와 운송, 정비, 판매, 생산 자재 등 전·후방 산업이 폭넓어 간접 고용까지 합하면 총 177만명의 일자리와 연관돼 있다. 산업 생태계의 가장 밑단에 있는 풀뿌리 제조업이 흔들리면 경제 전체가 휘청거릴 수 있다.

◇업황 최악인데 인건비마저 상승

"대기업 근로자가 이익을 다 가져가는 구조에서 근근이 버티던 중소 부품사들이 지금 망해가고 있습니다. 대기업은 망해도 주인만 바뀌고 근로자는 살아남겠지요. 하지만 중소기업은 사업주와 근로자 모두 공중 분해됩니다. 정부는 재벌은 때리면서 귀족 노조는 왜 잡지 않는 겁니까."

지난 4월 직원 36명을 22명으로 줄인 A사 대표는 울분에 차 있었다. 그는 "지난해 주간 근무자는 월 170만원, 주야 근무자는 240만원을 줬는데, 최저임금 인상으로 4대 보험료까지 올라 총 인건비의 24%가 올랐다"며 "제품 단가를 35% 올려주지 않으면 더 이상 납품할 수 없다고 1차 협력사에 통보했다"고 말했다. 이어 "협력사들 영업이익률은 기껏해야 1~2% 수준이고 마이너스인 경우도 허다하다"며 "경기가 좋을 때라면 문제없겠지만, 왜 하필 이런 어려운 시기에 최저임금을 인상하느냐"고 답답해했다.

매출 1000억원에 직원 270명인 현대·기아차 1차 부품사 B사의 김모 인사팀장은 요즘 걱정이 태산이다. 지난해 월 7억~8억원이던 인건비가 올해 월 10억원(연 120억원)으로 25~30% 늘었는데,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2020년)에 대비해 인력을 더 뽑아야 하기 때문이다. 김 팀장은 "최대한 자동화를 하더라도 30명은 뽑아야 해 최소 연 10억원이 더 든다"며 "한 해 순이익이 20억원인데 지출만 늘어나서 걱정"이라고 말했다.

◇"협력사 영업이익률 마이너스 많아"

국내 자동차 생산은 2011년 465만대로 정점을 찍고 감소세로 접어들었다. 2015년엔 455만대까지 유지했으나 2016년 422만대로 떨어졌고, 지난해에는 411만대까지 추락했다. 현대자동차의 영업이익률은 2011년 10.3%를 기록했으나, 이후 계속 하락해 지난해 5%가 무너졌고(4.7%), 지난 1분기엔 3% 수준으로 전락했다. 영업이익률 3%는 이자와 세금 등을 내고 나면 남는 것이 거의 없어 좀비 기업(번 돈으로 이자도 못 갚는 기업) 직전 수준으로 평가된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업계에선 지난해 1차 협력사 영업이익률 3%대가 무너진 것으로 보고 있다"며 "현대차가 3%면, 1차 협력사는 1~2%이거나 마이너스, 2·3차는 더 심각하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자동차 산업은 미국발(發) 무역 전쟁까지 겹쳐 더 큰 위기를 맞고 있다. 미국 정부는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한 자동차 관세 부과를 추진하고 있다. 업계에선 미 상무부가 9월 이전에 트럼프 대통령에게 관세 부과를 제안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만약 고율 관세가 부과되면 국내 완성차 업체들이 무너지면서 협력사들이 초토화될 수 있다. 현대·기아차는 국내 총 생산량 317만대 중 미국에 59만대를 수출한다. 한국GM은 52만대 중 13만대, 르노삼성은 26만대 중 12만대를 미국에 수출한다. 지난 5월 한국GM 군산공장 폐쇄 같은 사태가 곳곳에서 벌어질 수 있다. 당시 위기로 한국GM에서만 2700여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미국의 자동차 관세 폭탄이 현실화돼 15조5000억원에 달하는 미국 수출이 막히면, 13만개의 일자리가 위협받는다는 분석도 나온다.

연강흠 연세대 교수는 "제조업 중 가장 노동 집약적인 자동차 산업이 무너지면 한국 경제 전체가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라며 "외부 여건은 최악인데 노조와 규제로 발이 묶여 생산성이 더 낮아지고 있어 답답하다"고 말했다.




류정 기자(well@chosun.com);곽래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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