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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friday] 외도하는 동생을 보며 떠올린 남편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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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조선일보

/일러스트= 안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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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다방을 통해, 고통에 대처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보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치부를 다 드러내면서까지 타인의 위로를 구합니다. 그런가 하면 최후의 순간까지 아픔을 감추시는 분들이 있지요. 물론 정답은 없습니다. 내 마음이 갈구하는 것을 추구할 뿐이고, 내 마음이 허락지 않는 것은 마다할 뿐입니다. 다만 세월이 많이 흐른 뒤 후회가 찾아들기도 하더군요. 사람의 마음은 논리가 아닌 생물이고, 고통의 기억 역시 세월 따라 흘러가는 것이기에….

홍여사 드림


딸이 없는 저에게 딸 노릇을 톡톡히 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보다 열 살 아래인 우리 올케이지요. 며칠 전에도 일없이 저를 한번 들여다보러 왔더군요. 아직은 사는 게 바쁠 나이인데, 혼자 사는 늙은 시누이까지 챙기니 고마운 일이지요.

그날 마주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끝에 올케가 흐뭇한 소식 하나를 꺼내놓습니다. 내달이면 결혼 30주년을 맞는다는 겁니다. 그 말 듣고 저는 잠시 감회에 젖어 탄식했습니다. 신랑 신부 맞절을 올리던 올케의 앳된 얼굴이 눈앞에 선한데, 그게 벌써 30년 전의 일이 되어버렸다니요. 누나 셋 밑의 외동아들로 자라 저밖에 모르는 내 동생과 삼십 년이나 잘 살아준 올케가 저는 새삼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올케는 오히려 제 손을 잡고 저한테 고맙다고 하네요. "형님 아니었으면 저 이혼했을 거예요. 왜, 기억 안 나세요? 저 둘째 가져 배부를 때…."

늙어보니 기억이라는 게 믿을 게 못 됩니다. 절대 못 잊을 일을 까맣게 잊고 지내기도 하고, 말 한마디에 수십 년 전 감정이 고스란히 살아나 몸서리를 치기도 하네요. 올케가 말하는 그 일도 제 기억의 어느 한구석에 파묻혀 있다가, 올케의 말 한마디에 별안간 되살아나 어제 일처럼 생생해지더군요

아마 20년도 더 된 일일 겁니다. 둘째 산달이 다 된 올케가 늦은 밤에 제게 전화를 했더랬습니다. 울며불며 와 달라고 하니, 한달음에 달려갔죠. 다행히 배 속의 아이는 무사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불거져 있었습니다. 동생이 밖에서 한눈을 팔다가 올케에게 들켜서 그 밤에 난리가 난 겁니다. 아무리 내 동생이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제 자식 가져 배부른 아내를 두고 딴짓을 할 수 있는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모자랄 판에 이렇다 저렇다 말없이 뻣뻣이 웅크리고만 있는 동생을 보니 속이 터지더군요.

"그때 형님이 냅다 뺨을 때려 주셨잖아요. 그 귀한 동생을요. 기억 안 나세요?" 올케는 지금 생각해도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합니다. 물론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등에 업고 다닐 때도 궁둥짝 한번 안 때린 동생인데 그날은 저절로 손이 올라가더군요.

"그때 형님이 그이한테 그러셨죠. 네 복을 네가 찼으니 앞으로 각오하라고요. 그리고 저한테는 뭐라고 하셨는지 기억나세요? 아침저녁으로 남편을 달달 볶으라고 하셨지요. 10년간 들볶아봐도 아직 분이 안 풀리거든 그때는 꼭 이혼하라고. 그 말에 의지해 참다 보니 어느새 10년이 가고, 20년이 가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후회한다 그 소리여? 나한테 따지러 온 겨?" "아니요. 형님 말 듣길 잘했다고요. 요새 저희 제2의 신혼이거든요."

우리는 그렇게 농담하며 한바탕 웃었습니다. 올케가 떠나고도 웃음소리는 한동안 여운처럼 남아 빈집을 가득 채우더군요. 저는 그 쓸쓸한 울림 속에서 올케의 이야기를 천천히 새겨보았습니다. 길길이 뛰어준 '형님 덕분'에 남편도 제 잘못을 느끼고 변화된 모습을 보이더라는 얘기가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나한테도 그런 시누나 시숙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남편이 그렇게 뻔뻔하게 나올 수 있었을까?

올케는 물론이고 가족 그 누구도 모르는 얘기를 이 자리에 털어놓게 되네요. 실은 저 역시 남편의 외도로 말 못할 고통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결혼하고 7년째던가, 남편이 대놓고 여자가 있다고 밝히더군요. 앞으로 당분간 자기 행동에 아무런 간섭도 말라는 겁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자기도 마음이 괴롭다나요?

그런 철면피 같은 선언을 하고는 멋대로 며칠씩 외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씩 집이라고 들어오면 무슨 장한 일을 하고 왔다고 저에게 있는 대로 성질을 내곤 했지요. 그럼에도 저는 그 꼴을 견디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혼이 큰 흠인 시절이었고, 홀몸으로 자식 셋을 건사할 방도도 없었기에 그저 남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전전긍긍할 뿐이었습니다.

더구나 제게는 그 괴로움을 털어놓을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지금과 달리 어쩌다 한 번 만나는 친정 식구들에게 맏딸이 되어가지고 그런 얘기를 털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시집에도 속을 터놓을 사람이 없었지요. 보나마나 며느리의 부족함만 문제 삼을 게 뻔했으니까요. 지금 같으면 친구한테라도 털어놓겠는데, 그건 또 제 자존심 강한 성격 때문에 쉽지 않았습니다. 이래저래 심신의 고통과 분노를 혼자 짊어졌죠.

그렇게 철저히 혼자가 되어 버티다 보니 거짓말처럼 남편이 제자리로 돌아오긴 하더군요. 사과의 말 한마디 없이 슬그머니 가장의 자리로 복귀했습니다. 별일 아니라는 듯 멀쩡한 얼굴로 말입니다. 그리고는 예전처럼 가장으로 군림하려 들더군요. 그 꼴을 저는 또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올케의 부름을 받고 달려간 그 밤은 남편이 돌아오고도 몇 년이 더 지났을 때였습니다. 그날 저는 제 속에 쌓인 분노가 얼마나 큰지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동생이 아닌 남편의 뺨을 치며 소리친 겁니다. 네 복을 네가 찼으니 각오하라고요. 올케가 아닌 저 자신에게 다짐했던 겁니다. 10년만 참아보고 그래도 분이 안 풀리면 이혼하자고요. 누군가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을 제 입으로 한 겁니다. 어쨌거나 그날 이후 동생은 잘못을 깨닫고 20년간 진심 어린 반성의 모습을 보였다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일 뿐….

아마 하늘에서는 남편이 혀를 차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뭐하러 지나간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내느냐고요. 왜냐하면 본인은 옛날에 다 잊었을 테니까요. 아마 저도 잊은 줄 알았을 겁니다.

이미 저세상 사람인 남편에게는 더 이상 따질 말도 해줄 말도 없습니다. 대신 아직 살 날이 많은 동생과 혈기 왕성한 아들들에게 당부하고 싶습니다. 곁의 사람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요. 곁의 사람에게 대접받고 사는 삶이 가장 행복하다고요. 그리고 만약 곁의 사람에게 상처를 줬거든, 그 아픔이 사라질 때까지 어루만져 주라고요. 하기야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엇길로 첫발을 들일까요?

※실화를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이메일 투고 mrsho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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