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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태평로] 김호중의 “후회라는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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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저지르고도 큰소리 궤변

이 ‘괴물들’은 누가 씨를 뿌렸나

팬도 유권자도 묻지 마 함성

우리 사회 양심은 어디로 갔나

조선일보

가수 김호중./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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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에게 특별한 윤리 의식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도덕군자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갖고 있는 최소한의 책임감 같은 것은 있는 줄 알았다.

야심한 밤 서울 강남에서 자신에게 100% 잘못이 있는 교통사고를 일으켰는데도 뒤처리를 하지 않은 채 현장을 이탈했던 가수 김호중씨의 여러 논란을 보면서 예리한 칼로 자른 듯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게 됐다. 충돌 차량의 앞부분이 공중으로 들썩일 만큼 상당한 충격이 있었던 그 순간 김호중씨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극단적인 공황 상태에 빠져 지금까지 쌓아올린 인기 절정의 커리어가 한순간에 와르르할 수도 있다는 절망감이 엄습했을지 모른다. “침착하자”고 되뇌면서, 무조건 자신 편을 들어줄 매니저와 소속사 대표를 떠올렸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때 사고 현장으로 돌아가서 부상자를 살펴봐야 한다는 양심 같은 것은 왜 작동하지 않았을까.

그는 주말 공연장에서 “모든 진실은 밝혀질 것이다”라고 해서 아리송했는데, 사고 난 지 열흘 만인 어제 음주를 시인했다. 그 또한 코너에 몰리자 어쩔 수 없는 고백을 한 것처럼 들린다. 그가 들렀던 술집이 여성 접객원이 나오는 회원제 룸살롱이었다는 소문도 있고, 래퍼 출신 유명 가수와 개그맨이 동석했다는 얘기도 있다. 또 공연장에서 그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후회라는 단어다”라고 했다는데, 어떤 의미에서 후회였을까.

그는 이번 일을 ‘풀리지 않는 숙제’라면서 “바깥의 김호중이 있고, 무대의 김호중이 있는데, 무대의 김호중을 보여드리겠다”고 했다 한다. 어떤 대중 연예인에게 내재하는 전혀 다른 두 캐릭터가 무대 안팎에 병존할 수 있다는 부조리 예술철학이라도 설파하려는 것인가. ‘풀리지 않는 숙제’라며 던진 진실 게임 화두는 일종의 전략적 모호함처럼 들린다. 참 바르지 못하다.

그날 밤 그가 어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음주 운전의 죗값은 어떻게 치르게 될지, 또 매니저에게 옷을 벗어줘 바꿔 입게 한 경위, 소속사 대표의 옹호 발언, 사라진 블랙박스 등등 차차 밝혀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때부터 상황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핵심은 다른 데 있다. 처음부터 드러난 모든 정황 증거에도 거짓과 의혹의 사이즈를 키워가는 뻔뻔함과 어리석음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됐는가. 이런 괴물 같은 상황과 인간 군상은 왜 만들어진 것이며, 전도된 가치관 위에 축조된 허위의식 구조는 누가 씨앗을 뿌렸고 배양했는가.

가까운 원로 작곡가 한 분이 문자를 보내오셨다. 이쪽 생태계를 잘 알고 있는 분이다. 그는 지금 우리 정치를 주무르고 있는 몇몇 인물을 거론하면서 “범죄행위를 저지르고도 큰소리로 궤변을 늘어놓으며 날뛰고 있고, 그쪽 지지자들은 몰표까지 주고 있습니다”라고 통탄했다. 그러면서 “김호중이 하는 행위들이 똑같다”고 했다.

“처음부터 음주 운전에 사고 뺑소니 등등 거짓 언행들이 과학적으로 들통이 나는데도, 공연까지 강행하고 ‘진실은 밝혀질 것’ 이라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리까지 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의 팬들은 그간의 조사 과정을 보아 사건의 실체를 충분히 알 수 있을 텐데, 그런 김호중을 향해 박수 치고 함성을 질렀다니, 유명 정치인들이 하는 짓거리와 몰표를 주는 지지 현상이 똑같다고 했다.

이번 시즌에 수십 억 원이 넘는” 김호중의 콘서트 매출이 관련돼 있다는 말도 들린다. 김호중 티켓은 VIP석 기준 임영웅보다 2만3000원쯤 비싸다. 평균 20만원쯤 되는 티켓이 연일 매진되는 상황에서 물러설 수 없었을 것이고, 그때 양심이나 최소한의 책임감은 헌신짝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지금의 검찰 고위직을 잘 아는, 전직 검찰총장급의 비싼 변호인을 선임하면 돌파구가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이렇게 우리 사회의 양심은 마비돼 가고 있는 것이다.

[김광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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