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8 (토)

[Why] 시작과 끝… 삶이 주는 쓸쓸한 은유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그 작품 그 도시] 절대로 바꿀 수 없는 다섯 가지

최근에 만난 한 심리상담가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담자들이 고마워하는 부분과 자신이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전문가로서 자신이 준 구체적인 처방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에 감응한다는 게 요지였다. 눈빛, 미소, 사소한 칭찬 한마디 같은 것들 말이다. 우리는 대개 어떤 사람의 멋진 말보다 분위기를 더 오래 기억한다. 형식이 내용보다 중요하다면 그런 의미에서일 거다.

심야 방송의 DJ가 된 후 라디오에 도착하는 많은 사연을 접했다. 대부분 우울하고 아프고 답답한 사람들이 보낸 것이다. 최근 몇 명의 정신과 의사에게서 이런저런 조언을 들었다. 하지만 그날 만난 상담가에게서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말을 들었다. 상담사는 내게 '목발 역할'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다쳐서 힘들 때 잠시 옆구리에 끼고 걷는 목발 말이다. 그래서 가장 좋은 상담은 내담자가 자신에게 목발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잊는 것이라고도 했다. 가슴에 새겨둘 만한 말이었다.

그녀에게 읽어봐야 할 심리서의 리스트를 받았다. 이미 읽었거나 읽고 있는 책도 있어 반가웠다. 데이비드 리코의 '절대로 바꿀 수 없는 다섯 가지'는 그런 책들 중 하나다. 독서력은 절실함에 비례한다. 실연당한 가수가 이별 노래를 가장 잘 부를 수 있고, 막 이별한 사람이 그 노래를 가장 깊게 들을 수 있다. 좋은 선생이라면 단박에 알게 되는 진실이 하나 있는데, 가르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배우는 건 학생이 아니라 오히려 선생 자신이라는 것이다. 심야 라디오에서 상담을 하게 된 내 경우가 딱 그랬다.

조선일보

안개가 자욱한 갈대 숲. 저자는 절대로 바꿀 수 없는 다섯 가지 중 첫째로 ‘모든 것은 변하고 때가 되면 끝난다’를 꼽는다. 인간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조건들을 풀어놓으며 그는 인생이 좌절의 연속이 아니라고 말한다. 달갑지 않더라도 인생의 조건을 깊이 이해해 장애물을 넘어설 힘과 능력을 키워야 한다. / 픽사베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 책을 읽어왔지만, 요즘 나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책을 읽고 있다. 상담은 내 전문 영역이 아니었으므로 책을 읽을 때의 불안감이 심해졌다. 문장 앞에서 멈추는 시간이 많고, 책에 뭔가를 적는 날이 많아졌다. 아픈 사람의 마음에 연고가 될 만한 말과 문장을 어떻게든 찾아내 발라주고 싶었기 때문에 책을 읽다가 갑자기 앞으로 되돌아가는 일도 잦아졌다.

라디오에 가장 많이 오는 사연은 '변해버린 마음'과 관련된 것들이다. 내게 모든 걸 상의하던 그가 이제 회사를 더 중요시하고 이제 끝없이 자기 시간과 자기 공간을 요구한다는 말. 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아주던 그녀가 이제 자신과의 약속을 자주 잊고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말들. "마음이 너무너무 아파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은 아직 자신의 언어를 가지지 못한 보통의 사람들이 꺼낼 수 있는 가장 아픈 말들이었다.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부어의 기도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제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주시고, 제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평온을 주시고,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우리는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바꿀 수 없을까. '절대로 바꿀 수 없는 다섯 가지'에서는 첫 번째 바꿀 수 없는 것을 이렇게 꼽는다. 모든 것은 변하고 때가 되면 끝난다.

저자에 따르면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인다는 건 말이 달리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 앉는 것과 같다. 말이 달리는 방향을 향해 앉는다는 건 과거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욕망 때문에 헤매지 않고 지금 이 시간과 여기 이 장소를 존중한다는 뜻이다. 저항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으며 지금의 문제들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는 삶은 누가 덜 실수하는지 경쟁하는 게 아니라 배우며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실수한다는 건 어리석음의 표시가 아니라 지금 그 사람이 열심히 배우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그가 두 번째 말한 건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혼을 계획했던 그녀는 지금 목적지를 알 수 없는 배에 탄 난민처럼 마음이 불안하다고 얘기했다. 언제 끝날지 모를 그 사랑이 계속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1월 1일 그해 계획을 세우지 않게 됐는데 이유는 하나다. 계획대로 되는 게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작년 말 이례 없이 긴 올가을 연휴를 핑계로 로마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가 취소했다. 매일 방송되는 라디오를 맡은 후 장기간 여행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불과 넉 달 전만 해도 나 자신이 누군가를 상담하는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삶은 예상과 많이 달라서 우리를 언제 어디에 데려다놓을지 알 수 없다.

삶의 생로병사는 자연의 주기와 닮아 있다. 마음으로는 우리가 변하지 않을 것처럼 기만한다고 해도, 우리의 몸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사랑이 영원하길 바라는 간절한 희망이 있을 뿐. 사랑에도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이 존재한다. 꽃이 만발하는 로맨스 시기가 있고, 겨울 같은 갈등의 시기가 있고, 고통스러운 갈등 단계를 넘어선 헌신의 단계가 있다. 이 헌신의 단계가 실은 진짜 사랑의 시작이다.

사랑만큼 어려운 게 또 있을까. 고통 속에서 정신과나 라디오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대개 착하고 여린 사람들이다. 흔히 말하는 '나쁜 여자' '나쁜 남자'들은 이곳까지 쉽게 도착하지 않는다. 자기 합리화, 자기기만에 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도착한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때로 '그럼에도 헤어지지 않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헤어질 수 있는 게 사랑이다'라는 말이다. 그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백 가지 이유에도, 그가 술을 마실 때마다 나를 폭행하고 거짓말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헤어질 수 있어야 한다. 이때의 포기와 결별은 비겁한 게 아니라 자신을 보존하고 지키기 위한 또 다른 용기다.

내게 '목발' 이야기를 해주었던 상담사의 첫 직업은 편집자였다. 그녀가 정신분석과 상담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그 분야의 책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극적으로 직업이 바뀐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나를 매혹시킨다. 그것이 두려움을 넘어선 용기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비록 실패담이라 해도 나는 변화의 역사를 가져 본 사람의 이야기를 언제나 좋아했다. 끝이 있음을 알고 언젠가 자신을 다른 곳에 놓아본 적 있는 사람들 말이다. 한 친구를 얻는다는 건 어쩌면 한 친구를 떠나보낸다는 말이 될 수 있다. 시작과 끝, 빛과 그림자가 있다는 게 어쩌면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쓸쓸한 은유인 것 같다.

조선일보

●절대로 바꿀 수 없는 다섯 가지―데이비드 리코의 책

[백영옥·소설가]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