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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시가 있는 월요일] 삶을 함께한 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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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한밤을 펜과 씨름하다
책상에 엎어졌습니다
거기에는 책상의 이데아도 질료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나,
책상의 나직한 고동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 속에 세월을 묻고 가슴에 열쇠를 꽂은
숨소리가 나직한 늙은 책상은
내가 사춘기에 칼로 그은 상처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를 구원해준 책상
나를 잠재워준 책상
내가 후려갈기고 긋고 할퀴고 물어뜯고 종국에
머리를 박아대던 책상,
책상은 나를
제 다리 밑에 숨겨줍니다
거기서 손가락 빨며 눈 빨개지도록 웁니다

- 정한아 作 <愛人>

■ 책상을 의인화한 흥미로운 시다. 사춘기 이후 긴 시간 동안 나의 고민을 지켜보았을 책상에 대한 헌사다.

내가 칼로 할퀴고, 물어뜯고, 머리를 짓찧어도 말 없이 지켜보아 준 책상에 대한 고마움이 드라마틱하게 그려져 있다.

책상에 앉는 순간은 누구나 혼자가 되는 순간이다.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둔 그 순간부터 유일하게 나를 지켜보는 건 책상이다. 그래서 책상은 나의 내밀함을 가장 잘 아는 사물이다.

밤새 무엇인가를 쓰다가 책상에 엎드린 순간 시인은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아, 책상은 살아 있었구나!

책상에 감사하면서 살자.

[허연 문화전문기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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