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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후배 기자, 이규태에게 묻다] 31년 전 이규태 기자의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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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4월 4일 2만호 이규태코너에 '3만호 시대' 예측

마지막 문장은 "3만호 되는 날, 나의 예측 평가해 달라"

서울~뉴욕 45분에 돌파(×) 고독이 가공할 현실문제(○)

조선일보

기자='아날로그 시대의 검색창', 이규태(1933~2006) 기자를 저는 이렇게 부릅니다. 백과사전적 지식을 원고지 6.5장에 담은 '이규태코너'는 '잡학(雜學)의 미학' 그 자체였죠. '디테일 정보'의 비결은 뭘까요?

이규태=많이 읽기, 그러나 그냥 읽지 않기가 핵심이라오. 새벽 4시에 일어나 책을 집어드는 게 평생 습관이었소. 술값 밥값 아껴 산 1만여 권 책과 저널에서 얻은 정보를 10만여 개 색인으로 분류했지. 그 보물 덕에 1983년부터 그 칼럼을 6702회나 쓸 수 있었소.

기자=2006년 작고한 선배를 호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1986년 4월 4일, 조선일보 2만호 지면에 실린 '이규태코너' 제목이 '30000호 時代'였습니다. 미래를 예측한 칼럼인데, 마지막 문장이 이렇습니다. '3만호 시대가 되는 날, 누군가 이 예측이 얼마나 들어맞았나 맞혀 보았으면 싶다'. 이미 31년 전, 선배께서 후배를 소환해 놓은 겁니다.

이규태=그런가. 그래 어찌 읽었나.

기자=인용 목록이 짱짱했습니다. 미래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것은 근대 지식인들의 지적(知的) 사치 중 하나였지요.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쓴 미래 소설 '뉴 아틀란티스'(1627), 풍자적 미래소설 '에레혼'(1872), '에레혼(Ererwhon)'은 '노웨어(Nowhere)'를 거꾸로 조합해 만든 글자죠. 미국 SF의 효시 대접을 받는 1888년작 '돌아본 2000년(Looking Backward: 2000∼1887)' 등 보석 같은 이름들입니다. 행동 심리학자 스키너의 '심리 유토피아'를 인용했다고도 썼는데, 아무래도 1948년 그가 쓴 전설적 SF '월든 투'가 아닌가 싶습니다. 1986년 출간된 미 정부보고서 '2000년의 지구'도 목록에 있더군요.

이규태=내용 중 눈에 띈 것은?

기자=〈가사=全自動淸掃-全自動料理 같은 자동화가 진행되고 웬만한 가사는 로보트가 대행해 줄 것이다. 男女地位=여성의 지위가 급상승할 것이나 남자의 지위를 웃돌지는 못할 것이다. 섹스=남자는 성욕 감퇴가, 여자는 욕구 불만으로 사회문제화될 것이다. 家族=夫婦離合이 자유로워 씨 다르고 배다른 가족 구성이 될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의 대체적 경향을 정확히 짚어냈습니다.

이규태='항해술을 발명한 사람은 난파(難破)도 함께 발명한 것'이라지. 예측이란 틀리는 법, 뭐가 틀렸는지 어서 말해보게.

조선일보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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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우주스테이션에서 만든 약품과 식품을 동네 약국에서 사먹을 수 있게 되고, 뉴욕과 서울은 45분 만에 날 수 있는 초음속 여객기가 날 것이며, 심장병과 각종 암은 정복될 것이라 했다. 또 컴퓨터 발달로 언어 장벽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썼습니다만 기술 발전은 예측보다 더딥니다.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아직 약품·식품을 생산하지는 못합니다. 시속 2000km 이상의 콩코드 여객기는 소닉붐(음속폭음)과 사고로 2003년 중단됐고, 지난해에야 미국이 초음속여객기 프로젝트 'X플레인(Plane)'을 발표했습니다. 구글 번역기는 아직 오류가 많고, 우리나라에서만 각종 암으로 7만6855명, 심장 질환으로 3만3542명(2015년 기준)이 사망합니다. 〈食=감자와 토마토의 트기 식품인 포마토 같은 바이오식품이 보편화된다〉고 썼습니다. 현재 농업 기술로는 충분한 얘기지만, 대중이 그런 식품을 반기지 않습니다. 〈노동시간이 하루에 4~6시간에, 주 30시간을 넘지 않을 것〉이란 대목은 아직은 좀 먼 얘기입니다. 몇 곳 오류에도 불구, 글을 읽는 내내 흥미로웠습니다.

이규태=틀렸다면서 무슨 소리?

기자='미래상'에 관한 탁견 때문이지요. 〈고독=가공할 현실문제로 대두될 것이며 고독을 망각시키는 망각제가 요즘 소화제 이상으로 팔릴 것이다. 자살=물론 급증한다. 중세 유럽처럼 자살을 범죄시하여 형법으로 규제할 것이다〉 예측이 과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30년 전 인구 과밀의 한국에서 고독사와 OECD 최고의 자살률을 상상했다는 게 신선합니다.

이규태=19세기 쥘 베른 소설에 달 로켓이나 잠수함이, 에드워드 벨라미 소설에 신용카드 개념이 나온다오. 그들이 '족집게' 예측을 한 게 아니라, 그들의 '미래상(未來像)'을 후대가 구현한 것이지. 홀로그램을 발명한 노벨상 수상자 데니스 가버가 말했소.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들 수는 있다." 인류는 이 순간에도 미래를 만들고 있지. 그러나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다만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라는 윌리엄 깁슨(미국 소설가) 말처럼 체감하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기자란, 여기 서서 저기 오는 미래를 알려주는 사람 아닐까 하네. 내 예측이 좀 맞았다면, 그 기능에 충실했기 때문일 것이오. 가만있어보자, '4만호 시대', '5만호 시대' 자료도 내가 어디 색인을 만들어 뒀을 텐데….





[박은주·디지털뉴스본부 부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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