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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편집자 레터] 활자 중독과 키스 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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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어수웅 Books 팀장


직업 때문인지 천성 때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약간의 '활자 중독증'이 있습니다. 화장실에 신문 없이 들어간 날이면, 치약 성분표라도 읽곤 했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장소는 뉴욕 JFK공항. 런던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제 손에는 소설가 함정임의 '아주 사소한 중독'(작가정신)이 있습니다. 네, 이 책의 제목 역시 '중독'이네요.

출장 가방에 이 책을 넣은 이유가 있습니다. 16년의 간격을 두고 벌어진 기묘한 인연 때문입니다. 2001년에 초판이 나온 이 소설의 복간 특별판이 출장 전날 나왔더군요. 출판사 작가정신의 '소설향' 시리즈 5권 중 한 권으로 말이죠.

보름 전쯤 부산 동아대 학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잠시 화제로 삼았던 책이 '아주 사소한 중독'. 이 대학 한국어문학과 학과장이 소설가 함정임 교수였거든요. 16년 만에 다시 복간되어 나온다는 소식은, 당연히 몰랐죠. 그때는 제 책장에 16년 동안 자기 자리를 사수했던 2001년 판본을 들고 갔었습니다.

2001년의 서평 기사를 떠올립니다. 막 문학 기자를 시작하던 무렵인 데다 '키스 중독'이라는 사소하지 않은 중독을 사소한 중독이라 '강요'하던 탓에, 기억에 설핏 남아 있죠. 사랑이라는 '감정'을 혀라는 '감각'으로 혼동하고 서서히 중독되는 서사였습니다.

자정 임박해서 떠날 심야 비행기를 기다리며,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이야기의 주인은 작가가 아니라 이야기 그 자체가 아닐까. 단지 소설가의 몸을 빌려 자신들의 유전자를 실어나르고 있는 건 아닐까. 16년 전 이야기를 되살려낸 건 누구일까. 기억되어야 할 이야기는 결국 자신의 힘으로 번식하고 번성하는 것은 아닐까.

심야 편인 탓에 터미널은 상대적으로 조용하군요. 게이트 대기석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서울에서는 지하철에서도 보기 힘든 '희귀종'이라지만, 활자 중독 유전자들이 쉽게 멸종할 것 같지는 않네요.

작가정신이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답니다. '소설향'은 소설의 향기와 소설의 고향,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군요. 당신의 사소한 중독을 기대합니다. 뉴욕에서.



[어수웅 Books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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