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7 (화)

[문갑식의 세상읽기] 죽어야 죽는 줄 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사드 배치 지켜본 장성의 탄식

"목숨 지킬 무기, 동네방네 떠들며 들여오는 나라가 어디있나"

방송들 드론 띄워 기밀 누설하고 중국의 대응 운운하며 불안 조성

일국의 존망 걸린 위기 상황에선 알 권리보다 살 권리가 우선일 뿐

조선일보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정부가 고고도(高高度) 미사일 방어 체계, 즉 사드(THAAD)를 배치하는 과정을 보며 분개한 장성(將星)이 꽤 많다. "자기 목숨 지킬 무기를 동네방네 떠들며 들여온 나라는 지구 상에 없다"는 것이다. 조용히 경북 성주(星州)에 설치하면 됐을 일을 시시콜콜 정보를 공개해 잡음만 낳게 했다는 이야기다.

툭하면 '국민의 알 권리'를 끄집어내는 단골손님들이 그 틈을 타 등장했다. 그럴싸해 보이지만 이것은 무지(無知)의 고백이다. 존망 걸린 위기에서 최고의 정의(正義)는 국가 수호이기 때문이다. 북한 미사일이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판에 벌어지는 '알 권리' 타령은 '살 권리' 포기나 다름없다.

사드가 들어온 날 저녁 방송은 그 어처구니없는 가치 전도(顚倒)의 결정판이었다. 드론을 띄워 '하늘에서 본 사드 포대' '배치 하루 만에 실전 모드' 같은 기밀을 누설한 것도 모자라 "중국의 대응 수위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주목된다"고 떠들고 있다. 이 영상은 '군과 협의'를 거쳤다고 한다.

누가, 왜 드론 촬영을 허가해줬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 달리 남은 것은 '환경영향평가'니 '전자파'니 하는 한가하기 짝이 없는 무의미한 논쟁의 재연(再演)이다. 언론은 김정은의 '알 권리'를 알뜰히 챙겨주기 위해 절대다수 국민의 소중한 '살 권리'를 짓밟고 말았다.

'중국의 대응' 운운은 "중국은 빨리 보복해 주세요"라고 부추기는 꼴이다. 그 말을 한 기자는 사드가 공격용 아닌 방어용이며, 사드 레이더가 중국 요동(遼東) 쪽을 들여다보기 훨씬 전부터 중국이 한반도 전역을 샅샅이 살펴왔고 공격용 미사일을 우리 쪽으로 고정해놓은 사실을 아는지 궁금하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단군 이래 가장 부강하다. 그만하면 달그락대는 양은 냄비에서 은근한 무쇠 냄비로 성정(性情)이 바뀔 법도 한데 오히려 더 경망(輕妄)해졌다. 대표적 사례가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주석 간의 회담 뒤에 흘러나온 한마디에 나라 전체가 핏대 세운 일이다.

트럼프는 "시 주석으로부터 한·중(韓中) 역사에 대한 수업을 받았다. (시진핑은) 한국이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했다"고 말했다. 시 주석이 제정신이라면 "한국은 중국 식민지였다"는 식으로 말했을 리 없다. 한·중 관계를 '순망치한(脣亡齒寒)'정도로 설명했다고 믿는 게 합리적이다.

그 회담에 국민이 실망한 또 다른 이유는 트럼프가 왜 혈맹(血盟)인 한국의 역사를 세세히 몰라주느냐는 데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국 텍사스의 주기(州旗)가 왜 왕별이며 메이저리그 야구팀들이 유니폼에 홍관조(紅冠鳥)라든가 자기들이 멸종시킨 '인디언'이란 이름을 쓰는 사연을 다 아는가?

나라 전체가 울화병 걸린 것 같던 날, 나는 경기도 연천의 대전리 산성에 갔다. 이곳은 675년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이 세계 최강 당군(唐軍)을 격파한 매소성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한민족 연합군은 3만, 당군은 20만이었다. 7대1 싸움에서 이긴 우리는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뤘다.

이 자랑스러운 장소가 폐허나 다름없다. 군인들이 들락거린 흔적만 보일 뿐, 여기가 트럼프와 시진핑에게 가르쳐줄 역사의 현장임을 보여주는 것은 두 군데 세워진 설명 간판뿐이었다. 한탄강과 신천(莘川)이 보이는 산성에서, 나는 열흘 뒤 청와대로 이사 갈 차기 대통령이 갑자기 측은해졌다.

그는 떼쓰는 것을 묘수라 믿는 국민의 불안한 지지 속에 자위(自衛) 능력 없어 강대국만 바라봐야 하는 우리의 현실을 출근 첫날부터 깨닫게 될 것이며 선거 기간 중 내뱉은 무수한 허언(虛言)을 주워 담는 것으로 임기를 허송해야 하는 기구한 팔자(八字)의 소유자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녕 죽어봐야 죽는 줄을 아는 민족인가.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