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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지하철 누비는 여성보안관 “여자만의 섬세함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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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박소영 서울메트로 지하철 보안관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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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서울메트로 박소영(22·사진) 지하철 보안관은 2호선 잠실새내역으로 승강장 지원근무를 나갔다. 안전문 하나가 센서 이상으로 제대로 닫히지 않아, 내리고 타는 승객들에게 안전사고 위험이 있어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도착한 열차의 한 객차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었다. 의식을 잃고 거칠게 숨만 쉬고 있는 30대 여자를 승객 여럿이 승강장으로 옮긴 것이다. 한 남자 승객이 곧바로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119구급대에 신고한 뒤 현장에 달려간 박 보안관은 환자의 브래지어부터 풀었다.

“심폐소생술은 심장과 뇌에 산소가 포함된 혈액을 공급해주는 응급처치라 환자가 숨을 편안히 쉬게 하려면 가슴을 감싸는 속옷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승객들은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구급대가 올 때까지 정신없이 심폐소생술만 했다. 교육만 받았지 실제 상황에서는 처음이었다. 병원에 실려간 환자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지만, 왠지 두려워 물어볼 수 없었다. 며칠 뒤 잠실새내역에 들렀을 때, 역무원이 환자는 ‘청장년 급사 증후군’으로 승객들과 박 보안관의 기민한 대처로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고 알려줬다. 보안관이 된 뒤 가장 큰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다.

박 보안관은 3년 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기업의 보안업체에 입사했다. 태권도 4단인 그는 사람들을 제어할 수 있는 보안업에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대기업 사옥에서 일하면서 보안업이 아니라 서비스업에 가깝다는 생각에 회의를 느껴 1년여 만에 그만뒀다.

1년 전 서울메트로에서 지하철 보안관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했다.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터라 가족에게 미리 말도 하지 않았다. “합격 소식을 알려드리니 부모님은 공사에 들어간다고 좋아하시면서도 ‘지하철 보안관’이 뭘 하는지 궁금해하셔서 함께 인터넷에서 검색했어요. 그런데 처음 본 동영상이 하필 ‘매 맞는 보안관’이었어요. 취객한테 뺨을 맞는데도 보안관은 대응할 권한이 없다는 내용이었죠.”

동영상을 본 부모님이 강하게 반대했지만 그는 일단 해보고 정 힘들면 그때 그만두겠다며 밀어붙였다. 날마다 취객, 이동상인, 성희롱 승객 등을 만나는 ‘험한 일’이지만, 아직까지 뺨을 맞은 적은 없다. 2호선은 순환선이라 한번 잠들면 계속 돌기 때문에 취객을 깨우는 게 일이다. 남자 취객은 깨우면 대개 신경질을 낸다.

“깨우면 욕부터 하고 발길질을 하는 취객들 때문에 힘들어요. 2인1조로 함께 근무한 남성 보안관이 맞는 것도 많이 봤고, 다른 여성 보안관이 주먹으로 맞았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제가 운이 좋았던 거죠.”

지난겨울 ‘여성 혐오 승객이 있다’는 신고를 받았을 때다. 30대 남자 승객이 여자 승객들에게 “군대도 안 가는 X년들이…” 등의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지하철 경찰대에 신고한 뒤 역무실로 데려갔다. 술에 취하지도 않은 승객은 보안관과 몸싸움을 벌이며 난동을 피웠다. 보안관은 체포할 권한이 없어 경찰이 올 때까지 20분 동안 발길질을 당하면서도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자 취객도 종종 있다. 깨우면 남자들과 달리 화들짝 놀라며 민망해하는 승객이 대부분이다. 다음 역에서 바로 내리는 경우도 많다. “얼굴 화장이 다 번져 있고, 침을 흘린 분도 계세요. 그래서 저는 일지판으로 얼굴을 가려준 뒤 옷을 추스르면 바로 자리를 피해줘요. 남성 보안관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여성 보안관만의 섬세한 배려라고 할까요.”

술에 취하면 힘이 빠지면서 옷매무새가 흐트러진다. 짧은 옷을 입은 여자 취객은 성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 주의를 기울인다. 지난달 ‘술에 취한 젊은 여성을 안고 있는 노인이 수상하다’는 신고가 들어와 다른 보안관이 출동했다. 현장에 도착한 보안관이 “어떻게 아는 사람이냐”고 묻자 노인은 계속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고개를 숙인 여자에게 “아는 분이냐”고 묻자 “예, 알아요. 오늘 소개팅했어요”라며 끄덕였다. “얼굴을 잘 보라”는 보안관의 말에 노인의 얼굴을 쳐다본 여자는 “어, 아닌데. 웬일이야!”라며 화들짝 놀랐다. 소개팅 남자가 자신을 안고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성희롱 사건이 발생하면 2인1조로 출동해 지하철 경찰대에 인계할 때까지 여자 승객과 용의자를 분리한다. 남성 보안관이 용의자를 맡고, 여성 보안관은 다른 곳에서 여자 승객의 진술을 듣는다. 박 보안관은 “어떤 상황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기엔 같은 여자가 더 편한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메트로는 올해 보안관 58명을 신규 채용하면서 20명을 여성으로 뽑았다. 기존 6명에 불과했던 여성 보안관이 26명으로 많이 늘어났다.

“어딜 가나 ‘여자가 뭘 할 수 있겠느냐’는 말은 나오는 것 같아요. 동료들도 ‘내 애인이라면 보안관 못 하게 할 거’라고 해요. 그렇지만 저는 현장에서 시민과 만나 도와드릴 수 있는 이 일이 마음에 들어요. 이번에 20명이나 뽑았다는 건, 여성 보안관이 지금까지 잘해왔고, 필요하다고 인정받은 것 같아 뿌듯해요.”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사진 서울메트로 제공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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