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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1 (토)

“계엄군 발포로 무장” 광주시민…조사위, 무기고 피습 시간 규명 못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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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3일 김기광 5·18민주유공자 나주동지회 회장이 5·18 민주화운동 당시 무기를 획득한 전남 나주시 옛 금성동 파출소 예비군 무기고를 설명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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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민이 무장한 시점은 옛 전남도청 앞 계엄군의 집단 발포와 관련한 주요 쟁점이었다. 전두환 신군부는 시민이 먼저 총을 쏴 자위권(자기 방위) 차원에서 발포했다는 ‘시민 선제 무장설’을 주장했고, 광주시민들은 총을 쏘는 군인들에 대항하기 위해 총을 들었다고 맞서왔다.



지금까지 조사에서는 광주시민 주장이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1997년 전두환의 내란목적살인죄 대법원 판결, 2017년 전남경찰청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보고서 등은 모두 계엄군 발포로 인해 시민이 무장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5·18조사위)의 조사 결과는 달랐다. 5·18조사위는 지난해 말까지 4년간 무기 피탈 사건을 조사한 끝에 시점을 확정하지 못하고, 진상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국민의힘 추천 위원들은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 계엄군의 옛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이전에 일부 시민이 광주와 인접한 전남 나주와 화순에서 경찰 무기고 등을 습격했다고 주장했다. 주장의 근거로 나주 남평지서, 금성동 파출소, 영산포지서에서 21일 오전에 시민들이 총기를 탈취했다는 내용이 담긴 경찰 징계기록과 일부 경찰관들의 증언, 계엄군의 실탄 분실 기록 등을 내세웠다. 조사관들은 이를 받아들여 조사보고서에 오후 시간대로 잠정 결론을 내린 남평지서 등의 무기 피탈 시점을 ‘확정할 수 없었다’로 수정했다.



그러나 당시 현장을 목격한 이들은 5·18조사위의 결론을 두고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지난 13일 전남 나주시 옛 금성동 파출소 예비군 무기고(전남 5·18사적지 나주 1호) 앞에서 만난 김기광(62, 5·18민주유공자 나주동지회 회장)씨는 44년 전 이곳에서 봤던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고교 3학년이었던 그는 “21일이 쉬는 날이라 전날 나주 세지면에 있는 친구 집에서 하룻밤 자고 늦은 아침을 먹은 뒤 나주시내에 있는 집에 가려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니 ‘광주에서 큰일이 나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고 했다”며 “할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죽동 쪽 정류장으로 가니 버스는 안 보이고 시위대가 탄 버스와 군용트럭이 영암 쪽에서 오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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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 나주시 남평읍에 머물던 미국 평화봉사단원 폴 코트라이트가 찍은 남평지서 모습. 폴 코트라이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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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나주 시내로 가려고 시위대 버스에 탔다. 버스는 영산포를 한바퀴 돈 뒤 노안을 거쳐 금성동 파출소 사거리에 사람들을 내려줬다. 김 회장은 “사람들 수천명이 몰려 있었다. 갑자기 트럭이 후진해 무기고 측면을 들이받았고, 무너진 틈으로 사람들이 들어가 총을 갖고 나왔다. 늦은 아침을 먹고 세지 친구 집에서 오전 11시 넘어서 나와 택시를 타고 죽동으로 갔다가 다시 시위대 버스를 타고 영산포와 노안을 돌았으니 파출소에 도착한 건 오후 2시는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최병국(62)씨, 한영모(68)씨도 모두 오후로 기억하고 있었다. 최씨는 “밖이 시끄러우니까 나왔다가 군용트럭이 있길래 시원하게 보여 뒷자리에 탔다”며 “갑자기 트럭이 무기고를 들이받아 넘어질 뻔했던 기억이 난다.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씨는 “시위대 차를 타고 광주공원으로 바로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졌으니 오후가 확실하다”고 강조했다. 한씨도 “초파일이라 금성산 다보사를 가려고 집을 나섰다가 ‘광주에서 군인들이 총으로 다 쏴 죽인다. 우리도 무기를 들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금성 파출소로 갔다”며 “군용트럭으로 무기고 벽을 넘어뜨리는 모습을 봤는데, 오전 10시쯤 집에서 나와 터미널에 한두 시간 있었으니 점심시간 이후가 맞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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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21일 계엄군의 옛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직후 시민들이 무장하기 위해 무기고를 습격한 주요 경찰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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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경찰서 보안과 소속 경찰이었던 염행조(72)씨도 오전에는 무기고 피탈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염씨는 “21일 새벽 5시쯤 급한 호출을 받고 경찰서로 나가 오전 10시까지 상황실을 지켰지만 무기고 피탈은 보고받지 못했다”고 했다. 이후 지서에 있는 무기를 회수해 군부대로 옮기라는 명령을 받고 경찰서를 나서 다도·봉황지서를 거쳐 세지지서에 도착해 무기를 옮겨 실었다고 한다. 그는 “오후 1시30분쯤 경찰서 상황실로 확인하니 그때까지 경찰 무기는 탈취된 곳이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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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수거한 총기를 점검하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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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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