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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천상열차분야지도가 고구려 때 만들어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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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국보 제22호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의 사진. 많이 마모되어 판독이 힘들 지경이다./사진 출처=문화재청


[물밑 한국사-44]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돌에 새겨진 천문도이다. 천문도란 별자리를 새겨놓은 하늘의 지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태조 이성계가 태조 4년(1395년) 12월에 신하들에게 만들게 했다. 1만원권 지폐에도 실려 있어서 늘 가까이서 볼 수 있다. 국보 228호로 지정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본래 평양성이 전화에 휩쓸렸을 때 강에 빠졌다가 조선 초에 발견되었다. 권근과 유방택을 비롯한 11명의 신하가 전대의 물건인 천문도를 다시 돌에 새겼다. 이 돌이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검은색 돌이라 흑요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흑요석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한국민족대백과에 따르면 검은 대리석이라고 되어 있다. 높이 211㎝, 너비 122.7㎝, 두께 11.8㎝인데 특이하게도 앞면과 뒷면 모두에 천문도가 새겨져 있다. 왜 양쪽에 다 새겨져 있을까?

<증보문헌비고>에는 "세종 15년(1433년)에 신법 천문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다른 쪽 면에도 새긴 것이라고 연세대 나일성 교수는 말한다. 양쪽 면의 천문도는 배치 형태가 다르다. 한쪽 면은 천문도와 문자 부분이 많이 떨어져 있어서 어색하고 다른 면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나 교수는 태조 때 급하게 만들어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형태로 제작되었다가 세종 때 잘 정리해서 만들었다고 본 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선조 4년(1571년)에 목판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선조는 목판본으로 인쇄한 천문도를 고위 관리들에게 나눠줬다. 오늘날 이 목판 인쇄본은 현재 두 장만 발견되었다. 일본 덴리대학 박물관에 한 장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2006년에 신한은행이 일본에서 한 장을 사들여 국립고궁박물관에 기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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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837호 복각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의 사진. 숙종 13년에 태조 때 만든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다시 새긴 것이다./사진 출처=문화재청


숙종 때 이르러 조선 초에 만든 돌판이 알아보기 힘든 지경이 되어서 새로 비석을 만들었다. 보물 제837호로 지정되었다. 숙종 13년(1687년)에 만들었다. 이때도 물론 잘 정리된 형태의 모양이 선택되었다. 검은 돌에 만들어진 조선 초와 달리 하얀 대리석에 새겨졌다. 크기는 조선 초의 것과 비슷한데 두께가 30㎝로 훨씬 두꺼워졌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원본은 고구려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한국천문연구원의 안상현 박사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은 바 있다. 안상현 박사의 논문 <천상열차분야지도에 나오는 고려시대 피휘와 천문도의 기원>(고궁문화4호, 2011)에 나오는 새로운 주장을 소개한다.

천상열차분야지도가 고구려 시대의 것을 원본으로 한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원본 석각에 적혀 있는 아래와 같은 내용 때문이다.

-오른쪽 천문도의 석각본은 옛날 평양성에 있었는데, 병란(兵亂) 중에 강에 빠져 잃어버렸고, 세월이 이미 오래 되어 복사본도 없었다. 아아! 우리 전하께서 천명을 받으시던 초년에 한 사람이 복사본 하나를 바쳤다. 전하께서는 이를 보물처럼 중하게 여기셨다.

옛날 평양성이 나오고 병란 중에 잃어버렸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고구려가 멸망하던 때가 떠오른다. 하지만 저 문장에는 고구려라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과연 고구려 때 만들어진 천문도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가 고구려 것이라는 주장은 오래되었다. 1913년에 처음 등장했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천문학을 강의한 칼 루퍼스가 그 주인공이다. 루퍼스는 17세기에 만들어진 <해동잡록>에 천상열차분야지도 <천문도지>에 없는 단어가 있는 점에 주목했다.

<해동잡록>의 '권근전'에 수록된 '양촌도설'에는 병란 앞에 여계(麗季)라는 단어가 붙어 있었다. 루퍼스는 여계(麗季)가 '고구려 말기'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계(麗季)는 '고려 말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의 번역도 '고려말'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17세기에는 천상열차분야지도가 고려 말기에 대동강에 빠진 것으로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인식은 일제강점기에도 계속 되었다.

안 박사는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별이름을 분석하여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성립 시기를 밝혀냈다. 동양별자리 중에 건성(建星)이라는 것이 있는데,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이 건성이 입성(立星)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다. '건(建)'은 고려 태조 왕건의 이름 글자이다. 왕조 시대에는 왕의 이름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같은 의미를 가진 다른 글자를 사용했는데 '건(建)'은 '세우다'라는 뜻이어서 선다는 의미에 주목해서 '입(立)'으로 대체해 사용했다. 이런 예를 하나 더 본다면 무(武)는 호(虎)로 대치한다. 고려 때 만들어진 <삼국유사>에서도 흥무대왕을 흥호대왕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렇게 왕의 이름을 피하는 것을 '피휘' 또는 '기휘'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흔히 사용하는 한자를 왕이 이름으로 사용하면 일상생활이 너무 불편하다고 해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한자로 이름을 지었다.

건성을 입성이라고 쓴 것은 천상열차분야지도뿐이 아니라 조선 시대에 천문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보천가>와 <천문류초>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을 안 박사는 파악해냈다. 이로써 조선 초의 천문학은 고려 후기의 천문학을 그대로 계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천가>는 별자리를 암송하기 쉽게 만든 시 형태의 글인데, 조선의 천문학자는 모두 이것을 암송할 수 있어야 했다. <보천가>는 세종 12년(1430년)에 천문학자 선발 교재로 선정되었다. <천문류초>는 세종이 승지 이순지에게 명해서 만들게 한 천문학 교과서와 같은 책이었다. 이 두 책의 영향으로 조선 시대에는 쭉 건성을 입성으로 쓰다가 인조 이후에 중국과 같이 건성으로 바뀌게 된다. 숙종 때 만든 천상열차분야지도에도 건성으로 바뀌었다. 안 박사는 인조 때 서양 천문학의 영향을 받은 신법천문학이 도입된 영향으로 우리나라 고유한 별자리 이름이 되어버렸던 입성이 중국과 같은 이름인 건성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안 박사는 천문도의 문자 부분을 연구하여(<천상열차분야지도> 도설의 문헌학적 연구, 민족문화42집, 2013) 11세기에 만들어진 <몽계필담>에서 인용된 부분이 있다는 점을 밝혀냈다. 고구려 멸망 이후의 글이 인용되었다는 것은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원본이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을 높인다. 안 박사는 고려 공민왕 8년(1359년)에 홍건적이 쳐들어와 평양성이 함락되었을 때 원본이 대동강에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한다. 천상열차분야지도가 고구려 때 것이라고 한다면 건성을 입성으로 고칠 이유가 없다.

이치에 맞지 않는 낡은 학설을 지양하고 합리적인 연구 결과를 받아들일 때 우리 학문의 세계도 그만큼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문영 역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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