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0 (월)

판사 10명 중 9명 “대법원 정책에 반하면 불이익 우려”

댓글 1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대법원장은 모든 판사에 대한 임명권과 재임용권, 고법 부장판사 승진 결정권, 법원장 임명권 등을 가집니다. 인사권만 봐도 가히 ‘제왕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25일 법원 국제인권법연구회(회장 이진만) 주최 학술대회가 열린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광복관 국제회의실, 발표를 맡은 차성안 전주지법 군산지원 판사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차 판사를 비롯한 일선 판사들은 사법부 인사권이 대법원장과 법원장 등 소수에 집중돼 있다고 지적했다. 회의실을 가득 채운 170여명의 법조인과 법원 공무원, 시민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나타냈고, 힘찬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이날 법원 내 최대 학술연구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연구회)와 연세대 법학연구원이 ‘국제적 비교를 통한 법관인사제도의 모색-법관 독립강화의 관점에서’라는 주제로 함께 연 학술대회의 핵심 화두는 ‘제왕적 대법원장’으로 수렴됐다. 비대해진 대법원장의 인사권이 법관의 관료화를 낳는다는 비판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판사를 대상으로 한 현행 법관 인사제도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이런 문제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연구회가 지난 2월 전국 법관 3000여명에게 보내 502명으로부터 회신받은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조사에 응답한 판사 10명 중 9명(443명·88.2%)이 “사법행정에 관해 대법원장, 법원장 등의 정책에 반하는 의사표시를 한 법관이 보직, 평정, 사무분담에서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법관의 독립 보장을 위해 개선이 필요한 사법행정 분야가 있다”는 답도 96.6%(483명)에 달했다. 응답자 대다수는 승진제도와 전보제도, 재임용제도 개선을 선결과제로 꼽았다.

판사들은 대법원장 1명에게 전국 3000여명 법관의 ‘명운’이 달린 현행 인사제도가 문제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대법원장은 10년마다 판사 재임용 여부를 결정할 뿐 아니라 판사의 전보나 행정처 발탁 등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한다. 대법관을 제청할 위원회의 구성권도 갖는다. 대법원장 등 ‘윗선’의 의중에 어긋나면 인사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중압감이 재판 진행과 판결에도 영향을 미쳐 법관 독립성을 침해한다는 게 판사들의 위기의식이다. 실제 조사 응답자의 절반에 가까운 47.0%(236명)가 “주요 사건에서 상급심에 반하는 판결을 한 법관은 보직, 평정, 사무분담 등에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있다”고 답했다.

대법원장을 보좌하는 법원행정처 출신이 주요 재판부에 포진하거나 고등법원 부장판사 등 ‘승진’ 궤도를 밟는다는 비판도 나왔다. 일선 판사들은 “사법행정만 담당하는 법관 수를 대폭 축소하고, 행정처 등 행정 업무는 일반직 공무원으로 대체해야 한다”, “사법행정 중심의 법원으로 판사들이 재판업무 집중에 방해받는다”는 의견을 냈다.

설문조사를 주도한 연구회 소속 김영훈 서울고법 판사는 “법관이 사법행정권자로부터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것이 일반화되는 것은 우려스러운 일”이라며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권한을 민주적으로 분배하는 게 (문제 해결의) 핵심”이라고 짚었다. 판사들에 의한 사무분담 결정, 법원장 호선제, 직급별 판사회의 실질화 등이 대안으로 제시됐다. 연구회는 이날 발표 내용을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에 건의할 예정이다.

이번 학술대회는 진통 끝에 개최됐다. 대회 개최를 앞두고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연구회 소속 판사에게 대회 축소 등 부당한 지시를 내렸다는 의혹이 제기돼 이인복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진상조사위원회가 진상 규명에 나선 상태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주주신청]
[페이스북] [카카오톡] [정치BAR]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