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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조물주 위 건물주, 그 위엔 지역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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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특집 시민자산화

“주민들 땀과 웃음으로 일군

‘나무그늘’, 앞날이 암담”

9% 넘게 월세 올리고는 결국

“1억원 내놓든지 나가달라”

지역공동체까지 내몰린다

공간의 가치 함께 만들어도

건물주 독식한 뒤 내쫓을 뿐

영세상인만의 문제 아니다

도시 지속성·회복력도 타격

공간의 진짜 주인 누구일까


한겨레

서울 마포구 염리동의 지역공동체 ‘우리동네나무그늘협동조합’ 조합원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몫의 권리와 의무를 뜻하는 ‘1/n'이라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5년 전부터 카페 형태의 복합공간인 ‘나무그늘'을 거점으로 각종 마을 활동을 벌여온 이들은 건물주의 터무니없는 임대료 인상 요구에 지역에서 내몰릴 위기에 처했다. 우리동네나무그늘협동조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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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서울 마포 성미산마을에선 마을 주민들이 수년간 일궈온 마을의 사랑방이 치솟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사라질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는데, 비슷한 일이 또 인근에서 일어났습니다. 조물주보다 높다는 건물주는 주민들의 공동체 따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지역의 가치, 공간의 가치는 건물주 혼자 만든 게 아닌데 그 열매는 혼자 차지합니다. 시민 공동의 자산을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힘을 얻습니다.

“원래 (보증금) 3천만원에 290만원의 임대료(월세)를 내고 있었는데… 계속 있으려면 1억(원)에 350(만원)을 내라는 거예요. ‘나무그늘’이 문을 열고 주민들이 드나들면서 죽어 있던 골목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니까, 이분들이 생각하시기엔 상권이 살았다, 착각을 하신 모양이지요. 저희들이 버티니까 지난달에 명도소송을 냈어요. 본인들이 직접 운영을 하려는 생각이 있는 것 같아요.”

지난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수하동 페럼타워. ‘시민자산화’란 낯선 주제로 서울시마을공동체위원회와 협치서울추진단이 토론회를 열었다. 발제를 맡은 김성섭 우리동네나무그늘협동조합 이사장은 “지금부터 앞날이 암담해진 사례를 들려주겠다”며 찬찬히 운을 뗐다. 토론회에 참석한 150여명의 시민들이 일제히 귀를 기울였다.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 자리잡은 ‘나무그늘’은 카페 형태의 복합공간이다. 하지만 단순한 카페가 아니다. “지난 5년 동안 수많은 주민들의 땀과 웃음으로 일궈온 공간”이다. 김 이사장을 비롯한 몇몇은 5년 전인 2011년 5월 마을과 지역, 공동체 운동 등을 꿈꾸며 지역주민 중심의 협동조합을 꾸렸다. 나무그늘은 이들의 거점이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마을축제를 열고, 동호회를 꾸리고, 생활상담센터를 개설했다. 음악회와 극장을 열고, 마을 엄마들의 육아모임인 ‘마더센터’도 세웠다. 얼마 전 어린이서점도 개원했다. 대부분 지역주민인 조합원은 190여명. 한쪽 구석에 아이들 놀이방을 갖춘 나무그늘에선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려와 저녁모임을 여는 모습이 흔하다. 그야말로 마을 공동체의 중심축 구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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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 염리동의 지역공동체 ‘우리동네나무그늘협동조합’ 조합원들이 지난달 4일 카페 형태의 복합공간 ‘나무그늘’에서 ‘공간을 사수하라’는 제목의 후원파티를 열었다. 5년 전부터 이곳을 거점으로 각종 마을 활동을 벌여온 나무그늘협동조합은 건물주의 터무니없는 임대료 인상 요구에 지역에서 내몰릴 위기에 처했다. 우리동네나무그늘협동조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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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건물주는 이런 사정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2012년 242만원이던 월세는 이듬해 264만원으로, 2014년엔 288만원으로 야속하게 오르기만 했다. 인상액은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에서 상한으로 정한 9%를 넘나들었다.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는 2.2%, 1.3% 올랐을 뿐이었는데. 카페를 운영해 조합 활동비를 모아도 건물주가 냉큼 죄다 가져가는 구조였다. 급기야 올해엔 법이 보호하는 계약갱신요구권의 기한인 5년을 채웠으니 가게를 비우고 나가달라 했다. 그게 싫으면, 3천만원이었던 보증금을 1억원으로 올리고 월세 350만원에 재계약을 하자는 요구였다. 5년 동안 수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일궈낸 공간이 건물주의 말 한마디에 허무하게 무너져내리는 순간이었다. 건물주는 한술 더 떠 카페 내 시설물을 치워 텅 빈 원상태로 되돌리는 비용으로 1천만원을 별도 청구했다.

김 이사장과 조합원들의 고민은 깊어졌다. 인근의 다른 곳으로 이전해야 하나. 하지만 지역의 임대료는 전반적으로 올라 있었다. 그간의 활동으로 만든 수많은 관계들은 모두 마을 안에 존재했다. 이곳을 떠날 수는 없었다. ‘마을에 기반한 활동이니 마을에 거점을 둬야 한다.’ 하지만 감당해야 할 비용이 터무니없었다. 도움을 구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자구책이 필요했다. 급히 조합원들의 출자금을 늘리고 후원파티를 열었다. 2천만원가량을 모았지만, 건물주가 요구한 보증금 증액분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저희 열쇠 복사비가 5천원이거든요. 5천원 갖고 오시면 카페 열쇠를 복사해드리는데… 명도소송이 들어온 공간임에도, 희한하게도 조합원들이 계속 5천원을 들고 오셔서 열쇠를 복사하고 계세요. 그 열쇠로 따고 들어갈 문이 남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김 이사장이 발제를 마쳤다. 토론회 참석자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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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 염리동의 지역공동체 우리동네나무그늘협동조합이 바라는 ‘상상’. 1층엔 지금처럼 주민들이 편히 모여 함께할 수 있는 카페가, 지하엔 각종 공연장과 연습실이, 2층엔 공동육아를 위한 아이들의 쉼터가, 3층엔 지역의 청년이나 홀몸노인들이 머물 1인 주거 공간이 마련돼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다. 우리동네나무그늘협동조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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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그늘만이 아니다

이날 토론회의 주제인 ‘시민자산화’는 나무그늘처럼 정든 둥지에서 내몰릴 처지에 놓인 이들이 스스로 자산(공간)을 ‘소유’하고 자산운용을 통해 거둔 이익을 함께 나누자는 움직임이다. 특정한 개인의 것도, 정부나 지자체 같은 공공의 소유도 아닌 시민 모두의 자산. 얼핏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시민자산화’가 조심스레 대안으로 떠오른 건, 나무그늘과 같은 사례들이 곳곳에서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배경엔 이미 수년 전부터 국내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는 ‘둥지 내몰림’(젠트리피케이션)이 자리잡고 있다.

죽어 있던 공간이 되살아나더라도 그 열매는 공평하게 나뉘지 않는다. 유동인구가 늘고 거리가 활성화된 영향으로 지대가 올랐으나, 정작 그 지대 인상에 기여한 예술가들은 변방으로 쫓기고 지역공동체는 와해됐다. 예술가나 지역공동체가 주도해 만든 공간의 가치를 건물주는 홀로 독식했다. 외환위기 이후 크게 늘어난 영세자영업자들의 처지 역시 마찬가지다.

지역공동체가 맞닥뜨린 내몰림 사례는 나무그늘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7월엔 서울 마포 성미산마을 사람들이 ‘작은나무’ 사태를 겪었다. 나무그늘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이곳도 마을 주민 230명가량으로 구성된 협동조합이 운영한다. 1994년 아토피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걱정한 주민들이 모여 유기농 아이스크림 가게를 열었고, 2008년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어 8년째 운영 중이다. 카페는 조합원인 주민들이 십시일반 출자해 만들었다. 사랑방처럼 이용했고 그 덕에 카페와 그 주변이 활성화됐다. 하지만 한 해 전 바뀐 건물 주인은 이들에게 나가달라 했다. 역시 주변 임대료가 일제히 올라 옮겨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곳엔 카페 말고도 주민들이 터 잡은 공동체 공간들이 여럿 있다. 카페처럼, 다른 공간들도 치솟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비슷한 상황에 내몰렸다. 인근 부동산 중개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성미산마을이 있는 성산동의 부동산 가치가 상승한 데에는 이런 공동체 활동이 분명히 영향을 미쳤다. 전형적인 둥지 내몰림이었다. 주민들은 집회와 시위를 벌였고, 결국 서울시가 중재자로 나서 건물주와 계약을 2년 더 연장해 사태는 일단 봉합됐다. 문제는 앞으로다. 시민자산화는 과연 해법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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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 염리동의 지역공동체 ‘우리동네나무그늘협동조합’ 조합원들의 다양한 활동 모습. 우리동네나무그늘협동조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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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벽이 너무 높다”

현실은 섣부른 기대를 어렵게 만든다. 지난 4월21일 오후 서울 마포 망원동 망원시장고객센터 지하. 시민자산화를 주제로 지난해부터 이어온 ‘마포지역포럼’의 다섯번째 날. 이날의 토론 주제는 시민자산화를 위한 ‘지역기금 현실화 방안’이었다. 참석자 40여명이 포럼을 제안한 위성남 마포마을공동체생태계지원단 다정한사무소 단장의 제안 설명을 들었다. “‘기금이 무엇인가’라는 원초적 질문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기금은 저수지에 고인 물처럼 ‘모여 있는 돈’이에요. 소유주가 누구냐는 묻지 않는, 그저 일정 기간 모여 있는 돈입니다. 은행펀드 같은 영리기금은 개인 투자자를 모아 목돈을 만들고 이걸 다시 수익률이 좋은 곳에 투자합니다. 우리 같은 비영리기금은 다르죠.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여 있습니다.” 지역기금에서 시민자산화의 첫 실마리를 찾아보자는 뜻이었다.

각종 시민사회단체와 지역공동체 활동이 꾸준한 마포 지역엔 다양한 지역기금이 이미 여럿 존재한다. 성미산대동계(2007년 설립), 성미산동네금고(2011년), 마포공동체경제네트워크 모아(2015년), 공동체은행 은행나무(2016년) 등이다. 설립된 지 10년에 가까운 성미산대동계는 회원들의 납부액이 누계로 2억원을 웃돈다.

하지만 보잘것없는 ‘실탄’은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장애물이다. 지역기금 대부분의 보유 현금은 2천만~3천만원에 불과하다. 회원은 개인보다 단체가 많다. 지역 단체들끼리 급히 목돈이 필요할 때를 대비하는 용도다. ‘모아’의 경우 지난달부터 가게 이용권 성격의 지역순환화폐를 유통시킨다. 화폐를 받은 가게가 이익금의 일정 비율을 기부하는 방식으로 기금을 모은다. 시범사업이고 아직 출발 단계다. 4월 포럼 참석자들은 마포 지역 마을공동체, 사회적경제 활동가이거나, 내몰림에 맞서려는 이 지역 움직임에 관심을 갖고 찾아온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날 이들이 내린 결론은 시민자산화가 “쉽게 엄두 나지 않는 일”이란 것이었다.

과연 이대로 주저앉아야 하나. 지난 8일 성산동 다정한사무소에서 만난 위 단장은 “아직 벽이 너무 높다”고 답답해했다. 그는 “서울은 부동산 가격이 너무 올라서 건물 매입비용이 감당이 안 된다. 웬만한 건물은 20억원이 넘어간다. 한데 지역기금은 너무 작고 열악한 수준이다. 당사자들은 이게 쉽게 되겠나 이런 생각들이었다”고 했다. 위 단장은 “우리의 활동이 공공성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공공의 지원을 못 받을 이유가 없다. 우리 일의 성격을 더 부각하면서 지역의 공공자산을 왜 만들려 하는지, 그렇게 되면 무엇이 변할지 공론화가 필요하다는 논의가 있었다”고 소개했다. 마포의 시민자산화는 아직 더딘 걸음을 걷고 있었다.

성수동엔 ‘안심상가’를

“구 소유의 건물을 시민들이 위탁받아 운영하는 형태는 민간위탁 제도와 다를 바 없어요. 중요한 건 시민들이 자신이 살고 있고 사업을 하는 지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유도하는 것일 텐데, 위탁으로 하면 소수만 운영에 참여할 테니… 시민 참여의 여지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위탁운영형이 꼭 그런 건 아닙니다. 비영리조합이 관리 주체가 될 텐데 이걸 창구로 해서 자산화기금을 만들고, 추후에 시민주도형으로 바꿀 수 있어요. 물론 그렇더라도 민관 공동설립으로 했을 때가 더 시민 주도의 폭이 넓은 건 사실이죠.”

지난 17일 오전 서울 성동구청. 구청의 관련 공무원들과 구 도시계획위원회 위원, 성수동 사회적기업 대표 등이 참여한 작은 회의가 열렸다. 서울숲이 있는 성수동 지역을 중심으로 둥지 내몰림이 일어나는 성동구는 구 차원에서 적극적인 움직임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9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둥지 내몰림 방지 조례(지역공동체 상호협력 및 지속가능발전구역 지정에 관한 조례)를 선포했고, 구가 시민자산화 논의를 주도한다.

둥지 내몰림이 일어나는 성동구 성수동은 1970년대 밀집한 소규모 공장들과 낡은 다세대 주택들이 뒤섞인 낙후 지역이었다. 지하철 분당선이 들어서면서 강남 접근성이 좋아지고, 상대적으로 주변 지역에 견줘 임대료가 저렴한 이점 덕에 수년 전부터 사회혁신단체나 사회적 기업, 예술인, 청년 창업가들이 속속 입주했다. 이후 언론의 관심도 높아지자, 이 지역 건물을 고가로 매입하는 외지인들이 나타났다. 성동구의 둥지 내몰림 방지 조례는 내몰림이 일어났거나,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을 ‘지속가능발전구역’으로 지정하는 것을 뼈대로 한다. 구역 내에 주민 중심의 협의체를 만든 뒤 지역공동체 생태계와 상권에 중대한 피해를 줄 우려가 있는 업체의 입주를 주민이 직접 제한한다.

성동구는 또 성수동에 새로 지어지는 지식산업센터 같은 대형 민간 건축물에 용적률 등 혜택을 주고 일부 공간을 기부채납 방식으로 확보했다. 현재 4곳 240여평 수준인데, 해마다 이런 식으로 건축주로부터 공간을 넘겨받겠다는 계획이다. 구는 이를 다시 소상공인들에게 내줘 마음 놓고 장사할 수 있게 한다는, 이른바 ‘안심상가’ 구상이다. 시민자산화의 원뜻과는 조금 결이 다른, 공공의 자산을 활용하는 내몰림 방지책이다. 관 주도라 안정적이지만, 시민들의 참여와 자발성을 끌어내기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성동구는 내몰림 방지 대응반(TF) 내에 시민자산화 분과를 만들어 이 문제를 논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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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그늘’이 입주하기 전인 5년 전 건물 모습. 우리동네나무그늘협동조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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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이 지켜낸 펍

결국 숨통을 틔워줄 열쇠를 쥔 건 금융이다. 국내의 더딘 걸음과는 달리, 영국이나 미국, 프랑스에선 시민자산화 성공 사례가 꽤 있는 비밀도 이와 무관치 않다. 특히 영국의 경험은 눈여겨볼 만하다. 런던 남부 서더크 자치구 넌헤드 지역의 대중술집(펍) ‘아이비하우스’는 대표적 사례다. 아이비하우스는 1930년대 건축 양식과 공연 무대를 갖춘, 역사적·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펍으로 평가된다. 1970년대엔 록 공연이 활성화돼 여러 유명인들이 공연했다. 그러나 2012년 시작된 지역재생 사업으로 둥지 내몰림이 발생했고, 아이비하우스 건물의 소유주도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건물을 매각했다. 펍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주민 8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지역공동체를 조직하고 펍을 ‘지역공동체 가치자산’으로 등록해 달라 요청했다. 2012년 10월 서더크 의회는 아이비하우스 펍이 지역공동체의 화합을 유도하고 문화적으로 더 큰 가치를 지역사회에 제공할 것이란 이유로 영국 최초의 지역공동체 가치자산으로 등록했다. 주민공동체는 이런 문제를 돕는 법률 재단과 지역공동체 연합 ‘로컬리티’ 등의 도움을 받고, 역사적 건물 보호를 위해 기금을 지원하는 건축유산기금(AHF)과 사회적투자기업 등으로부터 돈을 빌려 6개월 뒤 81만파운드(약 13억7천만원)에 펍을 인수했다. 이들은 또 ‘공동체 주식’을 발행해 371명의 지역 주민 투자자를 모으기도 했다. 이곳은 지금 사회적협동조합인 지역공동체가 운영하는 영국 최초의 펍이 돼 있다. 아이비하우스가 펍 최초로 공동체 가치자산으로 지정된 이후 영국에선 300건 이상의 비슷한 청원이 잇따랐다.

무엇보다 법·제도적 뒷받침이 결정적이었다. 2010년 영국 정부는 지역의 시민사회와 지방정부로 권력을 이양하는 ‘로컬리즘’(지역주의)을 정책화했고, 이듬해엔 ‘지역주의법’(로컬리즘 액트)을 제정했다. 영국의 지역주의법을 연구한 남진 서울시립대 교수(도시공학) 등의 논문(‘젠트리피케이션의 부작용 방지를 위한 지역공동체 역할에 관한 연구’)을 보면, 핵심은 지역사회와 지역정부에 권력을 이양해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21명 이상의 지역 주민들이나 자선단체 등으로 구성된 지역공동체에 공공이나 민간의 자산을 우선 인수해 운영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지역 주택과 상점, 펍, 도서관, 공원, 축구장 등 지역공동체에 필요한 땅과 건물이 대상 자산이다. 지역공동체는 공동체의 복지와 이익을 위해 향후 5년 이상 가치가 있다 평가한 부동산 자산을 지역의회를 통해 ‘지역공동체 가치자산’으로 지정할 수 있다. 지역공동체 가치자산으로 지정되면 용도전환이나 매매가 어려워진다. 팔더라도 지역공동체에 우선적으로 팔아야 하며, 이 경우에도 6개월의 자금조달 기간을 주어야 한다. 지역공동체는 유예기간 동안 금액에 관계없이 동등한 의결권을 지니는 공동체 주식을 발행하는 등의 방법으로 자금을 모아 자산을 매입할 수 있다.

프랑스 파리의 세마에스트(SEMAEST·거리활성화정비국)란 이름의 지역자산관리회사 선례도 주목할 만하다. 서울시는 지난해 11월 ‘둥지 내몰림 현상 종합대책’을 발표하며 이 사례를 언급했지만, 아직 우리 실정에 맞게 구체화하진 못했다. 파리시는 2006년 파리도시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둥지 내몰림을 막기 위해 보호조처가 필요한 특정 거리를 ‘보호 상업가로’로 지정했다. 파리 시내 도로 전체의 16%인, 3만여개의 상업시설이 포함됐다. 보호 상업가로로 지정되면 이 거리의 건물 1층에 입점한 소매상이나 수공업 시설은 다른 용도로 전환이 불가능해진다. 파리시는 민관 합동출자 방식으로 세마에스트를 설립한 뒤 이 보호 상업가로 내 건물 1층 상점과 토지에 대한 우선 매입권을 부여했다. 세마에스트는 시내 11개 지역 내에 비어 있거나 매물로 나온 상가를 사들인 뒤, 당시 사라져가던 소규모 서점 등에 저렴한 임대료로 내줬다. 일정 기간이 경과하면 임차인에게 다시 되팔았다. 이 사업에 파리시는 1200여억원을 썼다. 영국이나 프랑스 모두 건물 소유주의 권한을 제한하고 지역공동체나 공공의 가치를 위한 일에 우선권을 내준 것이다. 무엇보다 시민자산화의 핵심요건인 자금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금융상의 우회로를 열어준 게 특징이다.

영국은 지역공동체에 권한
공동체 자산에 소유권 제한
주민들이 펍·상점 지켜내
프랑스도 ‘보호가로’ 지정
용도전환 못하게 막아

투기목적 소유권만 절대시
소유권에 새로운 관점 필요
지역가치 공유할 틀 있어야
“시민자산은 마을의 뒷산
뒷산 회복해야 지속가능”


가치를 함께 누릴 수 있어야

지역 상권이 거대 상업자본 위주로 획일화되고, 지역이 다시 쇠퇴하는 상황이 반복되면 도시의 지속성과 회복력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둥지 내몰림을 더 이상 개별 세입자와 건물주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재생의 틀에서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시민자산화 논의를 이끌고 있는 서울시 협치지원관실의 전은호 지원관은 “도시재생처럼 지역의 가치를 올리는 사업에서 임대료는 성과지표 중 하나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문제 지점은 임대인과의 상생협약으로 임대료를 올리지 못하게 해서 그 성과를 억누르는 게 아니라, 그걸 공유하는 시스템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데 있다. 인상된 지역의 가치를 나눌 수 있는 가치공유협약이나, 광의의 시민자산화라 할 가치공유시스템이 필요하다. 발전의 이익을 구성원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는 도시여야 회복력이 강해진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시민자산화는 본질적으로 공유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의 문제와도 연결돼 있다. 그간 정부는 공공이 소유한 땅을 대기업 자본에 쉽게 내주면서, 정작 시민이 공동으로 소유하며 공동의 효용을 누리는 것엔 인색했다. 정기황 문화도시연구소 상임연구원은 20일 토론회에서 “지하화된 경의선 6.3㎞의 지상 구간은 모두 공원이 됐지만 4곳은 ‘행복주택’ 등 임대주택이 계획됐다가 결국 대기업 자본에 넘어갔다. 공공의 자산임에도 그곳에 효성은 390실 규모의 호텔을 만들고, 에이케이(AK)는 쇼핑몰을 짓는다. 대기업엔 민간투자방식으로 50~60년까지 국공유지를 빌려주면서 공공 건물을 민간에 위탁하는 건 길어야 9년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시민자산은 과거 농촌의 마을사람들이 모두 함께 땔감을 구하고 버섯을 키우며 소나 염소를 풀어 먹이던 공동의 뒷산 같은 것이다. 이 뒷산을 회복해야 한다. 화목한 문중에 문중 재산이 있듯 시민과 주민에게 시민자산이 있어야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시민사회, 지역사회가 가능하다.” 유창복 서울시 협치자문관의 꿈은 나무그늘의, 작은나무의,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이 함께 간직한 꿈이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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