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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박래군씨, 왜 그렇게 사세요? 이름대로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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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박래군과 ‘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 소속 시민사회단체 대표 등이 2016년 9월6일 오후 서울 광화문 ‘4·16광장’에서 시국기자회견을 열어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개정과 특검 의결을 촉구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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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씨, 왜 그렇게 사세요?”



12년 전, 이세영 한겨레21 기자가 나를 인터뷰한 뒤 내보낸 기사의 제목이다. 내가 사는 방식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투의 제목이다. 마냥 기분 좋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같은 취지의 질문들을 종종 한다. 왜 아직도 그러고 사냐고? 이런 질문의 의도는 왜 아직도 힘든 일을 하며 사느냐는 취지이리라. 내가 하는 일이 무척 힘들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인권단체들을 만들고, 인권현안이 터지면 대책기구를 구성하고, 집회와 시위, 기자회견을 하고, 단식농성도 자주 하고, 그러면서 사회적 이슈를 만들고, 그러다가 재수 없을 때는 감옥도 다녀오면서. 살아온 인생이 평범한 이들의 눈높이에선 이상할 것도 같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답할 말이 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인권운동 하는 사람으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한다는 생각 정도이다. 억지로 답을 말한다면 “사람들 때문”이다.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지만, 힘을 주는 사람이 있고 그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또 하나 꼭 지켜야 할 약속이 있어서다. 사실 나는 먼저 간 동생(박래전)과 한 약속이 있다. 스물여덟 살에 두 살 어린 동생을 땅에 묻으면서 피눈물로 했던 약속이었다.



그런데 더 근원적으로는 내 이름 때문이다. 아버지가 이름을 잘못 지어주셨기 때문이다. 사실 내 생일도 문제다. 나는 1961년생인데, 그해 양력 5월1일에 태어났다. 5월1일이 어떤 날인가. 세계적으로 데모하는 노동절 아닌가. 생일도 그런데다가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박래군. 한자로는 朴來群이다. 눈 밝은 분들은 눈치채셨을 듯하다. ‘올 래’에 ‘무리 군’이라니. 무리가 온다? 그러면 무얼 해야 할까? 데모해야지. 나는 아버님이 지어주신 이름대로 살아왔을 뿐이다.



스물여섯이었던 1986년에 처음 감옥에 갔다. 그러다가 6월 항쟁 덕분에 1987년 7월 초 대전교도소에서 가석방으로 나왔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아버님은 복학하라고 요구하셨다. 노동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갔고, 평생 노동운동하며 살 생각이었던 나는 아버지 요구를 거절했다. 화가 난 아버지는 약주를 거나하게 드신 다음에 나를 앉혀놓고 다짐을 받으려고 했다.



“넌 왜 그렇게 사냐? 데모만 하고 살 거냐?” 금방이라도 주먹이 날아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때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님, 제 이름 누가 지어주셨죠?”



“네 이름? 그거야 내가 지었지.” “아니, 이름에다가 무리 군 자를 써서 지어주신 건, 무리와 어울려서 데모하면서 살라고 지어주신 거 아닙니까? 저는 아버지가 이름 지어주신 그 뜻대로 사는 거거든요.”



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셨고, 위험을 감지한 나는 그 길로 집에서 도망쳤다. 이럴 때는 삼십육계만이 살길임을 여러 해 길거리 데모에서 체득했다. 나는 간단히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 요구대로 학교에 복학해서 대학을 졸업했다. 당장 노동현장으로 돌아가 노동운동으로 복귀하고 싶었지만, 몸 상태가 허락하지 않았다. 13개월여 감옥생활 중 여러 번 끌려가서 묶이고, 밟히고, 매 맞았던 탓이었을 것이다. 앉아 있기도 힘들어서 당분간은 공장 일을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할 때 아버지와 타협했다. 대학 졸업만 하면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좋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복학은 했지만, 학교생활에 충실할 수는 없었다. 첫 감옥 출옥한 다음 해가 1988년이었다. 1988년에 내 인생의 최대의 사건을 겪었고, 그 일로 나는 인권운동에 입문했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지금까지 인권운동가로 살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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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은 1981년 연세대학교 국문과에 진학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다가 9년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1990년 2월 그의 졸업식에 함께한 아버지 박순순(왼쪽)과 어머니 김근순.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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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연재를 이어간다는 게 여간 부담이 아니다. 걱정도 많다. 과연 해낼 수 있을까? 글을 매주 써야 하는 부담도 있지만 그보다 ‘사람들이 읽어줄 만한 글을 쓸 수 있을까?’라는 부담이 크다. 한 인권운동가의 삶의 여정을 누가 재미있다고 읽어줄 것인지, 연재 중에 그만하자는 얘기를 신문사에서 듣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재미있게, 인권운동의 언어가 아니라 대중의 언어로 쉽게 얘기하고 싶다. 하지만 이 연재에서 다루게 될 일들은 나 혼자 한 게 아니다. 그러므로 많은 일들이 성과가 있었다면 그건 모두의 덕이다. 하지만 잘못도 얼마나 많았겠는가. 처음 시도하고, 닥치는 일들이 수없이 많았다. 성과 있게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도 부지기수다. 그런 일의 상당 부분은 내 책임이다. 그런 부분도 솔직하게 얘기하려고 한다.



연재는 대체로 다섯 부분으로 나눠서 진행해볼 생각이다.



먼저 내가 어떻게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는가를 말하려고 한다.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에서 문학을 꿈꾸던 청년이 학생운동권이 되고, 강제징집 당하고, 그러다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이후 감옥에 가게 된 사정을 얘기할 것이다. 소심하고 겁 많았던 한 청년이 혁명운동을 꿈꾸고, 혹독한 탄압 속에서 어떻게 단련되어 갔는지 얘기하고 싶다.



두 번째 시기는 유가협 시절이다. 나는 유가족이 되어 인권운동을 만났다. 인권운동을 한다는 의식도 없이 존재의 변화에 따라 만나게 된 인권운동이었다. 한때는 ‘재야의 장의사’란 별칭까지 얻었다. 나는 그때부터 죽음의 현장에 가까이 있었다. 내가 장례를 치러주었던 많은 열사들, 그리고 억울한 죽음들에 대한 얘기이고, 유가족으로 살아온 젊은 날의 비망록이다.



세 번째 시기는 인권운동사랑방 시절이다. 인권운동사랑방에서는 15년 넘게 일했다. 그곳에서는 매체의 편집자로, 다양한 사건 현장에 뛰어들었다. 인권운동가로서 정체성이 굳어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연대사업도 참 많이 했다. 표현의 자유에서부터 사회권, 평화권까지 내가 참여했던 연대사업의 지평은 넓었다. 많은 일을 시도했으나, 실패도 많이 했고, 뒷날의 과제로 남겨둔 일도 많다.



네 번째 시기는 ‘인권재단 사람’ 시절이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최초의 민간 인권센터를 지었고, 인권단체와 활동가들을 지원하는 일을 주로 했다. 그러면서 무언가 새로운 모색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도 시달렸다. 인권운동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는 생각도 많았다. 그런 고민을 하다가 세월호참사를 맞았다.



다섯 번째 시기는 2014년 세월호참사 이후의 시절이다. 세월호참사 이후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권운동의 궤적을 그렸다. 피해자의 곁을 지키는 활동가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실천해왔던 기간이었다. 그러다가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를 주도하였고, 비교적 최근에는 노란봉투법 입법운동과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을 본격적으로 해보았지만, 모두 실패했다. 가장 최근의 활동이지만, 여전히 미완인 일들이 넘쳐난다. 나는 현장 활동에서 한 발 빠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다.



누구처럼 논리적이지도, 똑똑하지도 못하다. 다만 사건 현장에 좀 더 가까이 가려고 했다. 어려운 사안일수록 도망가지 않으려 했다. 답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부딪히면서 조금이라도 틈을 내고, 공간을 열어보려고 했다. 내가 헤쳐온 수많은 사건들, 그곳에는 사람들이 있었고, 슬픔과 분노, 열정과 환호가 있었다. 그 시대에 그 현장에서 함께 겪었던 일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내가 하지만,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함께 나누는 인권운동기록, 그런 마음으로 연재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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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은 올래(來)에 무리군(群)을 쓴다. 자신의 이름을 두고 ‘아버지가 데모꾼 되라며 지어준 이름’이라며 웃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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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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