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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공화주의 무너지면 공화국은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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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손영준 국민대 미디어 광고학부 교수


헌법재판소의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다. 12·3 계엄과 국회 탄핵 여파가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제각각 찬탄과 반탄의 마음을 품고 있다. 사회 곳곳에서는 시위, 파업이 이어지고 있다. 정치권에서 시작된 갈등과 혼란이 사회 전체로 확산하는 모습이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좋은 삶, 옳은 삶의 다양한 모습을 공감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외피는 자유민주주의지만, 공론장은 진영 논리로 뭉쳐져 있다. 관점과 세계관의 차이는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진영 간 불화로 사회 전체가 표류하고 있다는 점이다.



헌법, 공화주의 원리로 상생 추구

임의적 지배는 개인의 자유 침해

‘비지배 자유’ 통해 공존·통합 모색

권력자·다수결 자의성도 견제해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헌법 제1조 제1항은 우리의 정체성을 천명한 것이다. 우리 정치체제가 민주주의(democracy)와 공화주의(republicanism)의 결합으로 이뤄졌음을 밝힌 것이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주의를 앞세우면 다수의 지배, 집단 갈등, 양극화가 극심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헌법정신은 공화주의가 갖는 견제와 균형, 조화 원리를 통해 각자가 상생을 추구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우리의 현대사는 그동안 민주주의를 주목해 왔다. 그러나 공화주의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었다.

공화주의는 로마에서 본격 시작됐다. 근대 르네상스를 거쳐 미국 독립과 프랑스 혁명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 전 세계 국민국가를 지탱하는 이념적 축이라 할 수 있다. 공화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이익을 조화하는 사상이다. 법의 지배를 통해 각자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누구도 공동체를 임의로 좌우할 수 없도록 권력을 분산하였다. 국정운영은 상호 견제와 균형·합의에 따른다. 모두가 국정에 참여할 길을 열어둠으로써 내부적으로 부패와 분열을 방지하고 또 외부의 침입이 있을 때 함께 방어에 나서도록 하였다.

철학자 필립 페팃은 ‘비(非)지배로서의 자유(freedom as non-domination)’개념으로 공화주의를 설명한다. 즉 공화주의에서 추구하는 자유는 외부 간섭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임의적 지배가 없는 상태이다. 예를 들어 건널목 신호등이 빨간불일 때 건너지 못하도록 하는 것, 공적 장소에서 흡연을 규제하는 것, 노동 관련 법에 맞춰 근로계약을 체결하는 것은 모두 간섭은 있지만 임의적 지배가 없는, 비지배 자유 사례에 해당한다.

우리의 공적 공간에는 그러나 권력이나 권한을 임의로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선거관리위원회가 간부 자녀에게 이유 없이 우대 점수를 줘 특혜 채용하는 것, 특정 후보에 대한 선거 여론조사 결과를 왜곡하는 것, 정파적 언론이 상대 진영에 유리한 사실은 축소 왜곡해 보도하는 것, 포털 네이버가 그들만 아는 알고리즘을 사용해 시민들이 특정 뉴스를 편식하게 하는 것, 출근길 지하철 운행을 고의로 방해하거나 도심 트랙터 시위로 교통 혼란을 일으키는 것 등은 결국 시민의 선택 자유를 임의로 침해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공화주의가 제대로 되기 어렵다.

공화주의는 또 임의적 지배 가능성도 경계한다. 입센의 연극 ‘인형의 집’에서 부인 노라는 남편이 부자일지라도 자신을 임의로 지배할 수 있다면 가정은 인형의 집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는 지배자의 선의에 의존하기보다는 예속적 지배구조 자체가 없어야 개인의 자유가 진정으로 확보될 수 있다는 공화주의와 같은 맥락이다.

공화주의에서 좋은 국가는 상호 이익을 보장하는 체제이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자라도 나쁜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보기에 견제와 균형, 법의 지배를 통한 권력 견제를 중시한다. 공화주의는 동시에 다수결주의도 반대한다. 선거에 따라 생겨난 권력이 중요 국가 질서나 법안을 쥐락펴락하는 것은 결국 다수자가 소수자를 임의로 억압하는 것에 해당한다. 공화주의는 다수의 의지도 적절하게 견제받지 않는다면 언제든 자의적 권력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권력을 쥔 소수도 다수 시민의 자유를 임의로 위협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느닷없는 계엄 선포와 국회 탄핵소추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혼란은 쉽게 해소되기 어려울 전망이다. 방안은 헌법 제1조 제1항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복원하는 것이다. 특히 실종된 공화주의를 되찾아야 한다. 국정운영에서 자의적, 임의적 권한 행사를 차단하고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 이것이 건강한 공화국을 만드는 길이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렸다는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 개인이나 집단은 누구나 경쟁자이면서 협력자인 이중적 정체성을 갖고 있음을 인정할 때 소통과 통합 여지는 마련될 수 있다. 법의 지배가 아닌 법을 이용해 정치권력과 진영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공화주의를 병들게 할 뿐이다. 공화주의가 무너지면 공화국은 위기다. 계절은 봄이지만, 우리의 처지는 봄 같지 않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손영준 국민대 미디어 광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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