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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선 긋는 일본의 첨단기술 국산화 [4강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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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편집자주

요동치는 국제 상황에서 민감도가 높아진 한반도 주변 4개국의 외교, 안보 전략과 우리의 현명한 대응을 점검합니다.

대미 '기술 의존' 탈피나선 일본
반도체, AI 등 전분야에서 진행
한국, 일본과의 차별전략 시급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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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첨단기술 국산화(Tech Decoupling) 전략을 본격화하고 있다. 반도체, 배터리, 첨단소재, 인공지능(AI) 등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핵심 산업에서 자립도를 높이고, 글로벌 공급망 내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이 움직임은 산업정책을 넘어 기술패권을 둘러싼 새로운 산업질서 출현을 예고한다.

2021년 이후 일본 정부는 핵심 산업을 중심으로 기술국산화 고삐를 죄어왔다. 반도체 산업 재건을 위해 라피더스(Rapidus)를 설립하고 IBM과 협력해 2나노미터 반도체 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 분야에서도 핵심 광물 확보부터 제조 공정까지 자국 내 수직 계열화를 추진 중이며, 2019년 한국에 대한 반도체 3대 소재 수출 규제 이후에는 첨단소재 자국화 전략도 더욱 강화해왔다. 이는 미중 기술패권 경쟁 속에서 미국과 전략적 연대를 유지하되, 핵심 공급망은 독자적으로 구축하겠다는 일본의 명확한 전략을 반영한다.

2022년 11월 챗GPT 등장이 전 세계를 강타한 이후, 일본의 AI 전략도 근본적으로 전환되었다. 일본은 생성형 AI 개발, AI 데이터센터 구축, AI 반도체 생산이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수직 계열화를 추진하며, '일본 기업이 주도하는 AI 미니 생태계'를 국내에 조성하고자 한다. 이는 미중과의 경쟁보다는 자국의 경제안보 확보에 초점을 둔 전략이다. AI 개발 분야에서 일본의 기술적 열세를 인정하면서도, 이 기술이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경제성이나 효율성만으로 판단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AI 생태계 조성을 위한 실질적 조치도 진행 중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2024년 2월 'GENIAC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일본어 기반 생성형 AI 개발을 위해 84억 엔 규모의 클라우드 솔루션을 7개 사업자에게 무상 제공했다. AI 데이터센터 구축에는 소프트뱅크, KDDI, 사쿠라 인터넷 등이 주도하여 총 4,500억 엔을 투자하고, 이 중 1,641억 엔은 정부가 보조한다. 프리퍼드 네트웍스에는 200억 엔을 투자해 2027년까지 엔비디아에 도전할 자체 AI 반도체 개발도 추진 중이다.

이러한 일본의 행보는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과의 경제·기술 협력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동안 일본은 한국 첨단산업의 핵심 소재 공급국이었고, 한국은 일본 부품과 장비의 주요 소비국이었다. 그러나 기술 국산화가 가속화되며 이 같은 상호의존 관계는 점차 약화될 가능성이 크다. 2024년의 일명 '라인 사태'는 일본어 학습 데이터를 보유한 라인야후의 전략적 가치가 AI 시대에 얼마나 커졌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협력과 경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새로운 국면이 도래하고 있다.

결국 일본의 기술 국산화 전략은 미중 기술패권 경쟁 속에서 독자적 기술 자립을 추구하는 '신 산업질서'의 서막이라 할 수 있다. 한국도 이에 대응하는 전략이 절실하다. 협력 가능한 분야는 공동 이익을 추구하되, 경쟁이 필요한 영역에서는 과감하고 독자적인 대응이 요구된다. 일본의 기술 자립화가 강화될수록, 한국은 차별화된 기술적 강점과 정교한 협력 전략을 동시에 갖춘 입체적 대응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보다 치밀하고 장기적인 전략적 선택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일보

이창민 한국외대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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