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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민의 문화 이면] "살민 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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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화제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살민 살아진다"는 제주 방언이 나온다. 어린 자식을 실수로 잃고 만 엄마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앞이 막막하다. 죽을 것 같고 죽고만 싶은 고통. 하지만 그러한 어마어마한 고통도 살다 보면 옅어지게 돼 있다. 그게 삶이다. 영원한 고통은 없다. 견디면 지나간다. 살 만해진다.

공교롭게도 요즘 내가 그런 상황이다. 정말 피하고 싶던 일에 붙잡혔다. 내 인생에서 한 번도 예상해보지 못한 종류의 일을 하게 됐다. 일종의 봉사직인데,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무거운 책임을 지는 그런 자리다. 억지로 이 일을 떠맡은 나는 그로 인해 입맛을 잃었다.

얼굴은 웃지만 마음은 울고 있는 방문 판매원의 마음에 자꾸 빙의된다. 그런 절박함이 필요한 자리인지라 기를 쓰고 피하려 몇 달을 도망 다녔다. 능력 있는 사람이 와서 비상한 기지를 발휘해야 돌파할 수 있는 일들이 산적해 있었다. 누군가를 모셔와야 했다. 그래서 찾아간 70대 선배 출판인은 심장에 스텐트 시술을 한 분이었다. 그분에게 제발 자리를 맡아 달라고 부탁하니 "그건 나더러 죽으라는 소리"라며 담담히 거절하셨다. 자괴감이 몰려왔다. 어차피 누군가 맡아야 할 일이고 누가 해도 스트레스인 일이라면 한 살이라도 젊은 사람이 하는 게 옳다는 윤리적 책무감이 들었다. 이런 나의 뇌 구조가 원망스러웠다.

결정을 내린 이후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떠올랐다. 생경한 외부인들을 만나고, 명함을 주고받고, 의례적인 이야기를 하고, 아쉬운 소리를 하거나 듣고, 행사에서 개회사를 하고, 회의를 주재하고, 대소사를 챙기고, 그러면서도 욕을 먹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책을 읽을 시간에 그런 일들을 하기는 싫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 시국에 내가 외부 일을 맡는다면 사업은 누가 돌본다는 말인가. 출판사를 뒷전에 두고 공무로 바빴던 선배들의 회사가 기울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러자 공포마저 느껴졌다. 뇌가 그 위기를 감지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와중에 뇌가 우회로를 만들어내는 게 느껴졌다. 아니, 정면 돌파라는 말이 더 맞겠다. 모든 건 마음에 달린 것이다. 그래, 마음을 바꾸자. 내가 해야 될 일이고, 기왕 하는 거 잘해서 성과를 내보자. 모든 게 새롭고 낯선 일이지만, 그래서 어렵겠지만, 어렵기 때문에 느껴지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재미는 또 다른 재미를 낳고 재미들이 모여 의미가 되고 의미가 생겨나면 용기가 더해져서 더 큰 꿈을 꿀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바꿔 먹은 지 두어 달 정도가 지났다. 이후 많은 게 달라졌다. 평소 가까운 이들 말고는 먼저 연락하는 일이 일절 없던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 소원했던 사람들과 약속을 촘촘하게 잡는 게 아닌가. 직업도 정치인, 공무원, 경찰관, 마케터, 사업가, 교수, 문화행정가 등 다양했다. 심지어 패션업체 사장님도 만났다. 그 업계의 지혜를 어떻게 우리 업계에 녹일 수 있을지 고민한다고 하니 흔쾌히 응해주셨다. 사람들을 만나니 비로소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게 실감 났다. 책을 통해 세상을 웬만큼 본다고 생각해 왔지만 극히 작은 부분이었다. 분야마다 언어와 논리, 경험과 철학이 있었다. 그 경험에 근거해 세상을 멋들어지게 해석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그토록 떠맡기 싫었던 자리가 나에게 새로운 배움의 기회를 주는 게 아닌가. 나는 내가 가진 걸 내놓기 싫어서, 그래서 도망 다녔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받는 쪽이 나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내가 편안한 일상에 머물러 있었다면 결코 얻지 못했을 경험들. 사람들은 이런 기회를 찾아다니는데, 나는 '억지춘향'으로 맡은 일을 통해 기회비용도 없이 공짜 수업을 듣게 된 셈이다.

이렇게 마음을 먹으니 가슴에 얹혔던 것이 많이 내려갔다. 그 대신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세우고 허물고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생활을 타이트하게 가져가니 기존의 것들을 포기하지 않아도 됐다. 회사 일도 예전처럼 챙길 수 있을 것 같다.

"살민 살아진다." 내가 갖다 쓰기에는 무거운 말이지만, 막다른 곳은 전혀 막다른 곳이 아니라는 걸 오늘 다시 한번 깨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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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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