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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1 (화)

[fn광장] 트럼프의 '명백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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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뉴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미국 건국의 통치 이념을 제공한 사상은 "자유주의(Liberalism)"다. 17~19세기 초 유럽 계몽주의 시대에 태동한 자유주의 사상은 정치영역에서는 당시 유럽의 절대군주제 정치질서를, 경제영역에서는 봉건제의 폐쇄적 경제질서를 극복하고자 한 매우 '진보적' 사상이었다. 자유주의 정치철학 창시자인 존 로크는 국가의 주권이 군주가 아닌 국민에게 있다는 '국민주권론'을 주창했고, 자유주의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부는 정부의 개입이 아니라 자유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창출된다고 설파했다.

유럽이 절대군주제와 봉건 경제의 '앙시앵레짐(구체제)'을 완전히 극복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반면 미국은 극복해야 할 구체제가 없었기에 '깨끗한 판'에서 자유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했을 때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All men are created equal)"로 시작하는 1776년 독립선언문은 가위 혁명적이었다. 자유주의 사상에 기반한 헌법을 제정해 국가를 건설했고, 세계 최초의 자유주의 국가로서 그 정체성은 흔들린 적이 없다.

미국의 자유주의 국가 정체성은 외교정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건국 초기 미국의 외교정책은 고립주의 성향을 띠고 있었다. 우선 대서양과 태평양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지리적 여건 덕분에 당시 국제관계의 중심이었던 유럽의 문제에 관여할 동기가 부족했다. 하지만 이런 물리적 요인 외에도 자유주의 국가로서 미국은 유럽과 달라야 한다는 '미국 예외주의'가 고립주의 외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첫째, 자유주의 국가로서 미국은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말고 주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이 작용했다. 둘째, 유럽의 전제군주 국가들이 벌이는 세력 다툼에 미국이 휘말릴 경우 자유주의 국가로서 미국의 정체성이 훼손될 위험이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독립선언문의 주저자인 토머스 제퍼슨과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자유주의 국가로서 미국은 유럽의 전제군주 국가들과는 분명히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자유주의 국가로서의 정체성은 18세기 말 미국의 외교정책이 완연히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며 영토 확장에 몰두하던 시기에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마크 트웨인, 앤드루 카네기, 윌리엄 J 브라이언 등 쟁쟁한 인사들은 '반제국주의 리그(Anti-Imperialist League)'에 참여해 미국 자유주의 정체성에 반하는 식민지배 정책을 강력히 비판했다. 필리핀 복속을 추진하던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은 강한 반대에 직면했었고, 그는 결정을 내리기 위해 신의 지혜와 인도를 구하며 기도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기도에 나타나 (몽매한) 필리핀을 점령해 그들을 "교화하고 문명화(civilize)"하라는 계시를 주셨다고 했다. 자유주의 국가 미국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을 내세우며 자신의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한 것이다.

미국이 영토와 세력권을 확장하는 이유는 단지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강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국 자유주의 이념과 제도를 전파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미국 예외주의'와 '명백한 운명'의 핵심 내용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미국의 '명백한 운명'을 우주로 확장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그린란드 매입과 파나마 운하 획득, 심지어 캐나다 편입과 같은 영토확장정책도 '명백한 운명'의 연장선에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의 영토확장정책에는 편협하게 정의된 미국의 안보·상업이익만 있을 뿐이지, 자유주의 국가로서의 '명백한 운명'은 결여되어 있다.

트럼프가 가장 존경한다는 매킨리 대통령은 그래도 자신의 영토확장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최소한 수사적으로나마 자유주의 국가로서의 도덕적 책무와 명백한 운명을 강조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아예 시늉조차 안 한다. 미국 역사상 이런 대통령은 없었던 것 같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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