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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쉬는' 청년 50만 명 역대 최대, 국가 붕괴 위기 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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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피터 터친,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한 구직자가 17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서 취업 공고를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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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예측 가능한가. 적지 않은 학자들이 '역사에 과학의 자리는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변덕스러운 존재라 종잡을 수 없고, 인간 사회의 작동 방식은 얽히고설켜 있어 너무 복잡하다고 여겨서다. 피터 터친 미국 코네티컷대 교수는 이런 견해를 정면 반박한다. 생태 및 진화생물학부·인류학과·수학과 교수인 그는 몇 가지 지표를 통해 사회가 언제, 어떻게 위기에 빠져드는지 감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피터 터친의 '역사동역학'


터친의 신간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는 역사가 작동하는 알고리즘에 대한 설명서다. "역사상 제국의 멸망을 설명하는 일반적 메커니즘"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냄으로써 역사의 지평선을 '교훈'에서 '과학'으로 넓힌다. 나폴레옹 시기부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등장에 이르기까지 세계 모든 대륙에서 발생한 300건의 위기 사례를 데이터베이스화(위기DB)한 뒤 '복잡계 과학(컴퓨터 모델링을 빅데이터와 결합하는 분석법)'을 활용해 이론을 정립했다. 역사학에 물리학을 접목한 이른바 '역사동역학(Cliodynamics)'이다.

이런 관심사는 성장 배경과도 관련이 깊다. 그는 소련에서 추방된 아버지와 미국으로 망명해 소련이 붕괴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면서 "왜 국가로 조직된 모든 사회는 결국 종말, 즉 고조된 사회적 격동과 정치적 폭력 그리고 때로는 붕괴의 시기로 접어드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됐다.

역사의 과학화는 보수, 진보와 같은 이념적 잣대에서 역사를 분리해 낸다. 특히 '역사 예보'를 가능케 한다는 측면에서 고무적이다. 유체동역학을 통해 일기 예보가 가능해지면서 자연 재해를 대비할 수 있었던 것처럼 '역사 재해' 또한 예측하고 대비할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엘리트 과잉 생산... 멸망의 위험 신호

신간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의 저자 피터 터친 미국 코네티컷대 교수.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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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친의 분석 결과, 역사 위기를 촉발하는 구조적 원인은 네 가지로 압축된다. 엘리트 과잉 생산, 대중의 궁핍화, 국가 재정과 정당성의 약화, 지정학적 요인이다. 가장 영향이 큰 변수는 사회적 권력을 가진 엘리트의 과잉 생산이다.

터친의 위기DB에 따르면 고학력자 청년의 과잉 생산은 1848년 혁명에서부터 2011년 아랍의 봄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격변을 추동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엘리트 내부의 경쟁과 갈등, 엘리트 진입에 실패한 자들이 불만을 표출한 게 직접적 원인이 됐다.

저자는 미국 남북전쟁을 촉발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도 엘리트 과잉 생산으로 본다. 1820년대 이후 성장의 과실 대부분이 소수에 집중되며 엘리트의 수와 부가 급증했다. 정부 공직과 같은 질 좋은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이 심화됐고, 미국의 기존 지배층이었던 남부의 부자들과 철도, 철강, 광업에 기반한 북부의 새로운 백만장자들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갈등의 불씨가 됐다는 것이다. 역사책은 남북전쟁이 노예제를 둘러싼 가치 충돌이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신구 엘리트들의 주도권 다툼이었다는 해석이다. 저자는 "국가가 붕괴하는 가장 빈번한 원인은 전쟁이나 전투에서 패배한 결과가 아니라 지배 네트워크가 내파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한국, 대졸자 비율 세계 최고

17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서 구직자가 취업 공고를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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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위기의 징후가 보이고 있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의 총국민소득에서 상위 1%가 차지하는 부가 1990년대 이후 2023년까지 2배 이상 증가했고, 대졸자 비율은 전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언급한다. 그러면서 "한국은 고급 학위를 가진 젊은 인재들을 소화할 만한 충분한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난관에 부딪혔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2월 고용동향'에선 구직 활동조차 않고 '그냥 쉬었다'는 청년층(15~29세)이 50만 명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박사학위자 중 30%가 백수이고, 특히 30세 미만 박사학위자 절반 가까이가 무직 상태라는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터친의 이론에 따른다면 한국은 역사 위기, 국가 붕괴 예보가 내려진 상태다. 터친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자기 나라가 극히 취약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우려를 전했다.
한국일보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피터 터친 지음·유강은 옮김·생각의힘 발행·424쪽·2만3,800원


송옥진 기자 clic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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