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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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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위에 꽃 떨어지듯, 두팔을 좌우로 뿌려라”… 조선시대 궁중 댄스 교본 20여종 영인 마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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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홀기 영인작업’ 마무리

“핸드북 크기 책속 깨알 글씨 한눈에

우리춤 연구-복원 속도 높아질 것”

무용수가 춘앵전 중 “물 위에 꽃 떨어지듯 춤춘다”는 ‘낙화유수(落花流水)’ 동작을 하고 있다. 국립국악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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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바라보는 듯한 자세로(花前態·화전태) 곱게 미소 짓고(媚弄·미롱), 물 위에 꽃이 떨어지듯(落花流水·낙화유수) 두 팔을 좌우로 한 번씩 뿌린 뒤 한 바퀴 돌아라(左右一拂一轉·좌우일불일전).”

동아일보

1893년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궁중 무용 교본 ‘정재무도홀기’ 가운데 봄에 꾀꼬리가 지저귀는 것을 표현한 ‘춘앵전’ 부분. 국립국악원 제공


조선 왕실의 댄스 교본이라 할 수 있는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가 알려주는 ‘춘앵전(春鶯囀)’ 추는 법이다. 춘앵전은 봄에 꾀꼬리가 지저귀는 것을 표현한 정재(궁중 연향에서 추는 춤)로 31가지 춤사위가 홀기에 아름답고 직관적으로 설명돼 있다. 홀기는 무용수가 춤을 어떻게 춰야 하는지를 한글과 한자로 적은 연습용 지침서다.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은 2022년부터 진행한 홀기 영인 작업의 마지막 발간물로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에 흩어져 있던 홀기 20여 종을 한데 모아 최근 ‘한국음악학자료총서 제59집’을 출간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처용무’가 담긴 국립중앙도서관 ‘진찬정재홀기’, 국립고궁박물관 ‘무법’ 등이 영인된 건 처음이다.

홀기는 조선시대 궁중 무용을 오늘날 무대로 복원하기 위한 핵심 자료로 꼽힌다. 의궤가 행사의 절차나 주관자, 춤 종류 등을 개괄적으로 기록한 데 비해 홀기는 춤사위, 노랫말, 반주 등을 상세히 담았기 때문이다. ‘춤추며 나아가 선다’는 뜻의 ‘족도이진입(足蹈而進立)’ 등 동작을 표현한 단어가 약 200가지에 이른다.

홀기에는 춤의 대형과 실제 연향에 출연한 무용수의 이름도 담겨 있다. 북 주위를 돌며 추는 군무인 ‘무고’의 경우 여자 무용수 ‘홍매’를 비롯해 출연 무용수들의 소속과 이름이 둥그런 춤 대형을 그리며 적혀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부 맥이 끊겼던 궁중무용을 1980년대부터 복원할 수 있었던 건 홀기의 역할이 컸다. 춤이 지금처럼 동영상으로 남아 있지 않은데도 홀기에 담긴 생생한 표현이 복원의 바탕이 됐다.

하지만 그간 홀기는 어람용 고문서 등과 달리 보존도가 떨어지고 세간의 관심을 받지 못해서 관련 연구가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신혜주 국립국악원 학예연구사는 “국립국악원 ‘정재무도홀기’는 1980년에 한 차례 영인됐으나 해상도가 낮아 주석을 읽기 어려웠다”며 “소장처별 자료들도 대부분 훼손 방지를 이유로 열람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번 영인은 가로 7cm, 세로 24cm의 자그마한 책에 깨알같이 쓰인 주석까지 읽을 수 있도록 고해상도로 진행됐다.

홀기 영인본 발간을 계기로 우리 춤에 대한 연구와 복원 속도가 높아질 것이란 기대도 커졌다. 그간 편찬 시기가 불분명했던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정재홀기’는 이번 영인 과정에서 헌종대 무신년(1848년) 자료로 추정된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재옥 학예연구관은 “편찬 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홀기들을 비교 연구하면 복원 수준을 높일 수 있다”며 “오늘날 여성 군무로 공연되는 ‘선유락’의 경우, 연대 불명 장서각 소장 홀기에선 남자 무용수인 무동들도 춘 것으로 나온다. ‘정재 악사는 남자, 춤은 여자’라는 인식을 넘어서는 기록”이라고 설명했다.

영인본 편찬에 참여한 김영운 전 국립국악원장은 “홀기의 내용과 맥락을 정확히 이해한 뒤에야 기존 해석을 보완하거나 현대적인 재해석을 가미할 수 있다”며 “같은 춤이 시대에 따라서 어떻게 변용됐고, 바뀌지 않는 정체성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짚어내는 것이 앞으로의 숙제”라고 말했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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