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님들께 다 미리 설명하고 사전에 동의하신 안건만 이사회에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이사회에 올라갔다는 것 자체가 다 동의하셨다는 의미이고, 그러니 100% 찬성이 나올 수밖에 없지요. 거수기가 아니에요.”
정식 이사회는 요식행위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 실질적인 검토를 거친다는 얘기다.
하지만 과연 그래도 되는 걸까? 공개된 이사회에서 설명하고 의사결정을 한 후 회의록을 남기는 것과 사전에 개별적으로 설명하고 따로 의사결정을 받은 후 회의록에는 간단히 결론만 남기는 것은 뭐가 다를까?
먼저 업무의 효율성이 떨어진다. 개별 사안마다 회의의 결론을 적용하는 것이 어렵다. 회의에 참여한 사람에게 물어봐야 할 수도 있고, 실무자에게 묻거나 회의 자료를 따로 달라고 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회의에 참여한 사람이나 회의를 준비한 실무자 개인에게 계속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상세한 회의록 하나 남아 있으면 해결될 문제를 계속 담당자에게 물어봐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된다. 정식 권한이 아닌 사적 관계에 의해 조직이 운영되어 효율성과 정확성이 떨어지고 결국 조직이 붕괴하는 것, 이것이 바로 회사는 물론 한국 사회에 전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비선 문화’의 큰 문제점이다.
공식 회의에서는 정해진 시간에 깔끔하게 정리된 자료로 형식적인 논의를 하지만, 실제 의사결정을 하는 논의는 회의 전이나 후에 다른 사람과 따로 하는 경우를 정말 많이 본다. 대기업이든 스타트업이든 다르지 않다.
회사뿐만 아니라 정부나 공적 조직에서도 정식 조직이나 직무 담당자와는 명분이나 당위에 관한 이야기만 하고, 실제 문제의 핵심인 이해관계나 유불리에 대해서는 다른 누군가와 이야기해서 푸는 경우가 허다하다. 권위주의적 거버넌스하에서 일은 해야 하는 실무자들이 만든 불가피한 현상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한국에는 실제 중요한 의사결정이 이렇게 ‘비선’에서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는 문화가 만연해 있다.
법령과 정관, 내규에 의해 부여된 직책과 직무에 맞는 정보만 받고, 그 권한 내에서의 결정만 하고 정확히 책임을 지는 것, 이런 쉽고도 단순한 것을 지키는 것이 회사든 정부든 좋은 거버넌스로 가는 첫 단추가 된다.
공개된 정식 회의에서 모든 논의를 하고, 권한이 있는 사람이 최종 결정을 하며, 논의 내용과 결론을 투명한 회의록으로 남겨 다른 사람이 빠르게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좋은 거버넌스의 시작은 정말 어렵지가 않다.
천준범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부회장 |
천준범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부회장
▶ 계엄, 시작과 끝은? 윤석열 ‘내란 사건’ 일지 완벽 정리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