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1.10 (금)

도파민 장사꾼이 설치는 나라의 종착점 [메아리]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계엄 후 갈등 '심리적 내전' 위험수준
이념 폭주한 국가 운명은 항상 비극
분열 팔아 표 사는 이들 꼭 기억해야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한국일보

반공청년단 단원들이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한 뒤 취재진 질의에 답하고 있다. '백골단'이라는 이름으로 대통령 관저 사수 시위를 벌인 이들은 윤 대통령을 지키고 대한민국 헌정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뉴스1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사회 갈등 정도가 민주화 이후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점에 큰 이견은 없어 보인다. 대통령이 서신을 뿌리며 지지층을 규합하자, 대통령 관저는 단숨에 이념 투쟁의 전장으로 떠올랐다. 반(反)탄핵이 표가 된다는 걸 눈치챈 의원들은 보수단체 집회에서 큰절을 하거나 관저 정문에 모여 ‘외곽 경비’를 선다. "관저에서 밥 먹자"는 제안에 응하지 않는 걸 보면, 그들에겐 대통령 눈도장보다 사진 한 장이 더 소중한 것 같다.

대통령이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놓으면서 이념 싸움은 갈등을 뛰어넘어 ‘심리적 내전’(정치컨설턴트 박성민) 단계에 도달했다. 중도에 등 돌리고 극렬 지지층에게만 어필하는 ‘도파민 정치’는 이미 세몰이 공식이다. 사설의 점잖은 당부, 칼럼의 신랄한 호통, 정치원로의 온건한 가르침이 도파민의 짜릿함을 이겨내지 못한다.

작정하고 싸우자고 덤비는 사람에게 당위(싸우면 안 돼), 도리(말로 풀자), 논리(너도 잘한 건 아니야)를 말해 봐야 무슨 소용인가. 차라리 행패가 가져올 후과, 깽판으로 치러야 할 값을 알려주는 게 낫다. 이념 폭주와 분열 조장은 사회통합을 심각하게 저해하고 때론 나라를 절단 내기도 한다는 걸 고지해야 한다.

‘모든 이념의 격전장’이라 불리던 1930년대 스페인. 프리모 데 리베라 군사독재 몰락 후 1931년 등장한 제2공화국 당시, 좌우 모두 양 극단에서 동시에 정부를 흔들어댔다. 이 이념 충돌은 체제 안에서 해소되지 못하고 결국 내전(1936~1939년)과 프랑코 독재로 이어졌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1918~1933년) 때는 극좌에서 공산당, 극우에서 나치당이 공화국을 위협했다. 공화국 붕괴의 결과는 우리가 다 아는 히틀러와 세계대전이다. 갈등을 외세가 이용하기도 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푸틴의 야욕 때문에 시작된 게 분명하지만, 이 과정에서 푸틴은 민족주의자(극우)와 공산당(극좌) 등 친러 세력 간 다툼을 이용해 분리독립을 부추겼다. 프랑스 혁명 이후 로베스피에르 등 급진파의 폭주는 테르미도르 반동을 거쳐 나폴레옹 독재로 이어졌다.

공통점이 있다. 극단적 이념 대립은 파국으로 치닫고, 갖은 혼란을 거친 뒤 종국엔 한 극단으로 급격하게 중심이 쏠리거나 독재자가 출현하는 엉뚱한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팽팽하게 좌우로 당겨진 고무줄이 끊어지면, 남은 줄이 한 쪽으로만 빠르게 홱 날아가는 모습과 유사하다.

‘극단적 예시만 든다’고 지적하는 분도 있겠다. 아직은 그 말이 맞다. 한국은 앞서 열거한 나라들에 비해 인종·민족·계급 등에서 갈등 정도가 덜한 편이다. 그리고 지금까진 진영논리보다 사리판단을 통해 세상을 보는 중도층이 힘겹게 중심을 잡고 있다.

그러나 비상계엄 이후, 우리는 민주주의를 든든하게 떠받치는 줄 알았던 헌법이란 지지대가 생각만큼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국가 중대사가 논리적 토론이나 사전 협의된 시스템이 아닌, 특정 학맥이나 무속인의 조언 등 불확실한 인적 변수에 휘둘릴 수 있다는 점도 알았다. 지도자의 망상에서 시작된 돌발행동이 국론을 둘로 쪼개고 국가경쟁력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과정도 목격했다. 지금은 심리적 내전이지만, 양쪽 다 기꺼이 싸울 준비가 된 상황에선 작은 불씨만 붙어도 '사실상 내전' 상황으로 비화할 수 있다.

선거가 3년이나 남았다는 걸 믿고, 마음껏 극단에 의지하며 분열을 획책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다음 선거에서 안면을 바꿔 △낮은 자세 △준엄한 민심 △통합과 협치 같은 말을 운운하도록 두고볼 순 없다. 단테가 ‘신곡’의 지옥 8층 한쪽에 분열 조장자들을 가두었던 것처럼, 도파민 장사에 여념 없는 그들의 이름을 우리 마음속 장부에 똑똑히 기록해야 한다.

이영창 논설위원 anti092@hankookilbo.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