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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0 (금)

[청계광장]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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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혜원스님 구리 신행선원장




무심히 하늘을 올려다본 후 피어오르는 아련한 감정은 과거 특정한 한 시점의 감정만은 아니다. 그것은 흔한 일상이라 여긴 숱한 순간 속에 늘 있었던 것이다. 이른 봄 눈 사이로 피어나는 복수초, 시냇물 졸졸 흐르는 냇가에 부드러운 솜털에 싸여 노란 왕관을 준비하는 버들강아지, 수십 년을 견딘 처마 끝으로 늘어져 내리는 고드름,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돌들이 삐죽이 두서없는 울퉁불퉁한 흙길, 소심하게 휘청이는 시골마을 흙담, 소나기 오기 전 땅에서 뿜어져 올라오는 흙내음, 무심한 방안으로 스며들어 오는 창밖의 장맛비 소리, 뭉게구름과 새파란 가을하늘, 바람에 날리는 꽃잎과 낙엽들, 빈 가지를 고스란히 드러낸 겨울산. 오감으로 경험하는 모든 일상에 그대로 우리의 피안이 현존한다.

보통 우리는 뭔가 바쁘게 좇아다니느라 눈앞의 일들을 무가치하게 그냥 흘려보내곤 한다. 관념 속의 온갖 환상에서 헤매고 그 환상에 또 다른 환상을 겹쳐 거대한 환상의 세상 속에서만 살아간다. 그러다 가끔은 그 환상에서 벗어나 실존의 자신과 마주할 때 찌릿하게 가슴 속에서 전율이 일어나 뜻 모를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우리의 욕망은 타고나는 듯해도 지금 내가 욕망하는 것은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닌 게 대부분이다. 그냥 우연한 인연에 의해 그것을 갈구하게 됐을 뿐이다. 애타게 갈구하며 몸부림치는 자신을 깊은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자비와 사랑의 시작이다. 세상에 사랑과 자비가 필요한 것은 저마다 결핍과 갈애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결핍을 메우고 사랑한다면 애타게 사랑을 노래할 필요까지는 없을 터다.

중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이었던 한 시인은 자신의 시에서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다'라고 썼다. 그도 시적 감성에 머물지 못한 것인지 홀로 서지 못하고 결핍에 발목을 잡힌 것 같다. 하지만 저 문장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지금 그대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온전해지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일상에서 피안을 발견하고 무심히 지나친 흔한 일상이 보석 같은 순간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개인적으로 전남 화순 운주사의 천불천탑을 좋아해 가끔 찾는다. 아무렇게나 두드려 깎아 만들어 언덕에 기대어놓은 불상들, 하늘의 구름을 조작조작 떼어다가 쌓아올린 듯한 무질서한 탑, 전통적 양식은 살짝 무시하며 조성된 불탑들을 보면 제멋대로 생겨먹은 군상들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대선사의 자유로움이 가슴을 푸근하게 한다.

저 산에 못나고 잘난 나무가 따로 있을까, 혹은 못난 바위 잘난 바위가 따로 있겠나. 하물며 사람이야 무어에 그리 귀하고 천할 것이 있겠는가. 세상은 인연에 따라 빈부의 격차가 생기게 마련이다. 저 산의 나무들 형편이 그러하듯. 하지만 그것으로 귀천을 따진다면 공부가 많이 필요한 사람이다. 형편이 귀천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씀이 귀천을 가를 뿐이다. 오히려 그런 것으로 귀천을 따지는 그의 견해가 빈천한 것이다.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자신을 불행하게 여기는 것은 제 살을 도려내는 자해행위와 같다. 또한 자신이 가진 재화로 뭇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오물로 자신의 몸을 치장하는 것과 같다. 스스로 움츠러드는 사람과 잘났다며 뽐내는 사람은 결국 같은 곳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진정으로 자신을 연민하고 사랑한다면 각기 홀로 선 둘이 투명한 눈으로 웃으며 만날 수 있을 것이다.

3000년 전에 분 바람은 오늘도 여전히 어디선가 불어가고 3만년 전에 내린 빗물도 여전히 어느 냇가를 흐른다. 오늘도 여전히 세상은 온갖 모습과 소리로 가득하고 꽃도 됐다가 노래로 흐른다. 애써 불만을 품지 않는다면 그 피안 속에서 차안(此岸)의 사람들과 함께 웃고 춤추며 모두 한시름 흘려보낼 수 있지 않을까

혜원스님 구리 신행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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