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한 축제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수프. 게티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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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끝 시린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스페인 북부 빌바오의 한 간이주점 바르(Bar) 창문에는 ‘국물 있어요·Hay Caldo’라고 적은 종이가 스파이들 비밀 접선 표시처럼 붙었다. 그 옆집 가게는 우리네 옛날 목욕탕 표지판처럼 커피잔 위로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는 그림을 입간판으로 세워 놓았다. 스페인 북부 사람들이 겨울만 오면 즐겨 찾는 단골 메뉴. 뜨끈뜨끈한 스페인식 수프 ‘칼도(Caldo)’를 판다는 안내다.
타파스를 먹으며 맥주를 마시는 스페인의 바르는 허기진 동네 사람들이 하루 종일 드나드는 참새방앗간이다. 아침에는 거친 빵에 생마늘과 푹 익은 토마토를 흠뻑 바른 ‘판 콘 토마테(Pan con tomate)’를 방금 짠 오렌지 주스에 곁들여 먹는데, 한번 맛보면 바로 중독성이 느껴지는 인기 메뉴다. 출출한 오후 시간이면 얇게 썬 하몬을 빵 사이에 넣고 올리브유를 듬뿍 뿌린 스페인 대표 샌드위치 ‘보카디요 데 하몬(Bocadillo de Jamon)’이 주인공이 된다. 저녁을 먹기 전에는 식전주인 베르무트를 마시며 친구들과 수다를 떨기도 하고, 과음한 다음 날 아침에는 갓 튀긴 추로스를 걸쭉한 초콜라테에 푹 찍어 먹으며 스페인식 해장도 가능하다.
겨울이면 여기에 추가되는 메뉴가 바로 따뜻한 칼도 한 사발이다. 뼈째 썬 닭고기에 당근 양파 샐러리까지 숭덩숭덩 썰어서 노릇하게 구운 다음, 커다란 냄비에 물을 채워 푹 끓인다. 닭살을 발라내고 걸러낸 국물은 냉장고에서 밤새 식힌 후 국물 위로 굳은 지방을 걷어내야 한다. 고기 없이 오븐에 잘 구운 야채만으로 맛을 우려낸 채식 스타일이 있는가 하면, 하몬을 더 넣어 고기의 감칠맛을 더한 육식주의자 버전도 있다. 완성된 맑고 진한 국물은 스페인 요리의 기본 육수로 사용되는데, 겨울철에는 다른 조리 없이 따스하게 데워서 그냥 마시는 게 진리다.
바르 문이 열리며 차가운 겨울 공기를 잔뜩 묻히고 들어온 손님들은 “여기 칼도 한 잔이요!”를 외친다. 그러면 바텐더는 국 그릇도 술잔도 아닌 머그잔에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국물을 한가득 채워 건넨다. 여기에 취향껏 매운 소스를 몇 방울 떨어뜨려 휘휘 저어서 마시고 나면 몸속 깊은 곳에서 온기가 훅 하고 올라오면서 앉은 의자 위로 몸이 스르륵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더운 국물로 몸을 데워야 마음에 위로가 되고 지친 기운을 북돋는다고 믿는 스페인 사람들. 기분이 가라앉은 날에, 몸이 찌뿌드드한 날에, 칼도를 마시고 나면 “국물은 신이 내린 진미(El caldo es un manjar de dioses)”라고 말하는 그들의 말에 수긍이 간다.
우리나라도 깊어가는 겨울, 바람은 매서워지고 땅은 꽁꽁 얼어붙었다. 일기예보에서 보는 영하의 온도 표시가 그저 숫자가 아니라 날카로운 바늘이 꽂히는 듯한 고통으로 바뀌는 계절이다. 따뜻한 방 안에서 일상을 누리는 이들도 있지만, 손끝 발끝부터 심장까지 얼어붙는 추위를 견디며 길 위에서 버텨내는 이들도 있음을 기억한다. 겨울의 한기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 이들에게 딱딱하게 굳어가는 몸과 움츠러든 마음을 녹일 국물 한 사발을 전해주고 싶다. 덜덜 떨리는 겨울을 물리치고 우리 모두의 소중한 일상이 회복된 훈훈한 봄이 곧 올 거라는 희망을 담아서 말이다.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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