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를 지키는 것은 건전한 보수당의 책무입니다."
2015년 4월8일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의 유승민 원내대표 연설은 정치사에 각인돼 있다. 대선 슬로건의 대명사로 손학규의 '저녁이 있는 삶'이 꼽힌다면 국회 연설의 백미는 유승민 연설이다. 심지어 야당에서는 "찬사를 보낸다"는 반응까지 나왔다. 어떤 내용이 담겼기에 경쟁 정당에서조차 호평이 나왔을까.
유승민은 공동체, 성장과 복지, 빈곤의 해법, 정치의 품격, 시장경제와 가계부채, 국가안보에 이르기까지 각종 의제에 관한 철학을 제시했다.
"새누리당은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는, 나누면서 커가는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정당이 되겠습니다."
야당이 유승민 연설을 긍정평가 하면서도 내심 긴장한 이유는 진보 의제까지 넘나드는 보수의 유연함 때문이었다. 유승민 연설은 어떤 정치세력이 국가경영 적임자인지를 놓고 벌이는 정책 경쟁의 신호탄이었다. 중도를 넘어 진보 일부까지 품는 어젠다 실험이 성공적으로 연착륙했다면 한국 정치지형은 근본적으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공동체와 관련한 보수당 책무를 강조한 대목이다. 10년 전 유승민 연설을 지금 곱씹어봐야 하는 이유는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이어지는 정국의 해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이 2023년 11월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백양관에서 글로벌사회공헌원 리더십센터 주최로 열린 초청 강연에서 '어떤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인가'란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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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현직 대통령이 내란 수괴로 의심받는 초유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총을 쏴서라도 문을 부수고 (국회의사당에) 들어가서 끌어내라." 서울중앙지검의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공소장에는 당시 대통령이 수도방위사령관에게 전화로 무엇을 명령했는지 상세한 내용이 녹아 있다. 특수전사령관에게는 "문짝을 도끼로 부수라"라고 명령했고, 이는 '대통령님 지시'라는 부연 설명과 함께 현장 지휘관에게 하달됐다.
83페이지에 달하는 공소장을 보면 비상계엄 준비 과정부터 실행 이후의 과정까지 전반을 확인할 수 있다. 공소장 내용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놀라움을 넘어 숨이 막힐 정도다. 군대를 동원해 계엄 해제 표결을 막는 것은 대한민국 헌법은 물론이고 계엄법에도 없는 법 위의 행위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이 법을 준수할 의지가 있는지, 특히 헌법 수호의 자격이 있는지를 살핀 뒤 파면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현실은 공화정(共和政)의 가치와 관련이 있다. 지난해 12월3일 뜬눈으로 밤을 새웠던 시민들은 공동체에 관한 보수당의 책무를 묻고 있다. 법원이 발부한 대통령 체포영장 집행을 막겠다며 국민의힘 의원 44명이 한남동 관저로 달려간 장면은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내란 정국의 소용돌이에 스스로 뛰어드는 행동은 책임이 뒤따른다. 당의 미래를 생각하기보다 정치인 각자의 생존을 위해 위험천만한 도박을 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극단적인 언어의 홍수 속에서 대한민국은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다. '심리적 내란'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지금의 상황을 해결하기는커녕 부추겨서야 되겠는가. 눈앞의 유불리만 따지는 정치로는 난국을 타개할 수 없다. 위기를 일단 모면해 보겠다고 이른바 아스팔트 극우에 기대는 행보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채로 남게 된다는 얘기다.
나라를 맡겨도 될 정당이라는 기대가 흔들리면 그동안 쌓아왔던 정치적인 지위마저 위협받을 수 있다. 내란의 주홍글씨를 품은 채 수권정당의 꿈을 키울 수 있겠는가.
류정민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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