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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목)

[안보윤의어느날] 배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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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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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위는 차들로 가득했다. “날이 갑자기 추워져서 그런가, 유난히 차가 많네.” 언니가 운전석에서 목을 길게 빼 주위를 살폈다. 영하의 날씨긴 해도 햇빛이 강해 사방에서 반사된 빛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바로 앞의 차체도 그런 식으로 빛났다. 지붕에서 트렁크로 이어지는 매끄러운 곡선을 따라 빛이 줄지어 흐르다 불규칙하게 튀어 올랐다. 여느 차와 다른 점이 있다면 후방유리에 붙은 A4 용지 두 장 정도였다. 뭐라고 쓴 거야? 내가 묻자 언니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초보 운전이겠지, 뭐.” 그러나 종이는 영 어색한 위치에 붙어있었다. 굵은 획으로 눈에 잘 띄게 쓰곤 하는 ‘초보’ 글자도 보이지 않았다. 신호가 바뀌며 차들이 멈춘 덕에 우리는 종이에 쓰인 얇은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신생아 이동 중’ ‘배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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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하고 언니가 탄성을 냈다. “신생아라니 정말 귀엽겠다.” 언니가 손을 잼잼 쥐며 말하는 통에 웃음이 났다. “무슨 소리야, 신생아가 얼마나 못생겼는데. 언니네 애들 태어났을 때 내가 얼마나 충격받았는지 알아?” 놀리듯 말했지만 반쯤은 진심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쪼글쪼글하고 온통 새빨간 데다 눈, 코, 입, 이마가 구분 없이 납작했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애벌레 같은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언니는 아기 입이 새부리처럼 뾰족해지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하면 젖을 먹였고, 미세하게 콧잔등을 찌푸리거나 딸꾹대면 서둘러 기저귀를 갈았다. 아기에게서 도무지 눈을 떼지 않았다. 아기는 모든 것이 엉성해 보였다. 이렇게 날것인 채로, 온몸 구석구석이 미완성인 채로 세상에 나와도 되는 건가. 나는 내내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아기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니까 이건 돌봐줄 수밖에 없겠다, 돌연 결심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작고 연약하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생명체라면 내가 지켜줄 수밖에 없겠군, 하고 말이다.

그런 존재가 저 차에도 타고 있겠구나. 나는 종이 위의 글씨를 다시금 살폈다. 신생아의 ㅅ자가 처마 끝처럼 날렵하게 들려 있었다. 세로획이 반듯하고 균형이 잘 잡힌 글자들이었다. 정자를 쓰고 뒤차 운전자 눈높이를 가늠하며 종이를 붙였을 어떤 손도 오래전에는 통통한 애벌레 같았겠지. “아기 뇌는 순두부 같아서 함부로 흔들면 큰일 나.” 몹시 얇은 유리 그릇을 옮기는 것처럼 언니는 천천히, 느릿느릿 아기를 안아 올리거나 내려놓곤 했다. 못생기고 새빨갛기만 했던 아기가 단단하게 여물어가는 과정을 나는 곁에서 지켜보았다. 녹은 크림처럼 몰랑대던 팔다리에 어떤 식으로 근육이 붙어 뒤집기를 하고 걷기 시작했는지, 거즈로 살살 문질러 닦아주던 잇몸에 어떤 순서로 이가 돋았는지. “조리원에서 집으로 이동하는 건가? 아니면 예방주사 맞히러 가나?” 언니가 앞차에 맞춰 속도를 줄이며 말했다. “요즘은 소아과병원 있는 건물 엘리베이터에서나 아기들을 마주치지 다른 데서는 통 볼 수가 없어. 아기가 너무 귀해.” 언니가 천천히, 느릿느릿 앞차를 뒤따랐다. 주위 차들도 비슷하게 움직이는 듯했다. 다정하고도 한없이 당연한 모두의 태도였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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