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STOP 권력 쏠림
① 코드인사부터 제3자 개입된 임명 번번이
② 검경 비롯 권력기관은 물론 사법부도 눈치
③ 與, 내각 견제 대신 '대통령 심기 경호' 분주
④ 승자독식 속 협치 증발, 극한 대치 · 비효율
편집자주
2024년 12월 3일, 대통령의 '내란 사태'라는 역대 최악의 헌정 위기로 한국 사회는 중대한 기로에 놓였다. 인물의 문제인가, 제도의 문제인가, 두 문제가 만난 비극인가. 한국일보는 2025년 신년을 맞아 전문가들과 현행 대통령제 운영 방식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했다. 이를 담은 '대통령제, 새로고침' 시리즈를 3회에 걸쳐 보도한다.노무현(왼쪽 사진부터) 전 대통령, 이명박 전 대통령, 박근혜 전 대통령, 문재인 전 대통령이 각각 취임식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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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이 있는데도 행사를 안 했는데 왜 제왕적 대통령인가." (문재인 전 대통령 · 퇴임 직전 언론 인터뷰에서)
"대통령 중심제라고 하지만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 집권 4년 차 언론 간담회에서)
한국의 대통령이라면 공히 겪은 고락(苦樂)이 있다. 권력의 정점에서 임기의 포문을 연다. 내각과 주요 공직을 내 사람으로 채운다. 내각은 물론 권력기관 · 수사기관도 대통령 눈치를 본다. 힘이 세질수록 협치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 야당이 약할 땐 독주하지만 야당이 셀 땐 교착 상태만 이어진다. 리더십에 의문이 커지고 지지율이 빠진다. 임기 후반으로 가면 모든 시선이 차기 대권에 쏠린다. 관료들도 요지부동이다. 지지율이 더 빠진다. 내 편이 현격히 준다. 결승선을 향할수록 외롭고 무력하다.
이 굴레에서 자유로웠던 대통령은 드물다. 이처럼 승자독식으로 시작해 레임덕(lame duck · 임기 말 권력누수)으로 끝나는 비극의 저변에는 무너진 삼권분립이 자리한다. 대통령에 쏠린 각종 권한 때문에 여당도, 권력기관도, 사법부도 대통령 표정을 살피며 눈치를 본 탓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12·3 불법 계엄' 사태도 이와 무관하다고 단정하긴 어렵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는 "인사권, 정책 독주 등 대통령 혼자 저질러 버릴 수 있는 여지가 큰 대통령제 운영 방식의 근본 한계와 윤 대통령이라는 인물이 만나 최악을 만든 것"이라 진단했다. 현 작동 방식을 유지하는 한 극한 대치나 헌정 위기가 되풀이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인사는 나의 힘
대통령 권력의 원천은 인사권이다. 행정부 수반으로 국무총리, 국무위원을 임명해 내각을 꾸리는 것은 물론 검찰총장, 국가정보원장, 경찰청장, 국세청장, 감사원장 등 각종 권력기관장 인사권도 가진다. 70여 곳 공공기관장을 비롯해 산술적으로 대통령 입김이 미치는 자리가 7,000여 개에 달한다.
인사 스타일은 매번 도마에 올랐다. 노무현 정부는 '코드인사', 이명박 정부는 '고소영·강부자 인사', 박근혜 정부는 '수첩·밀봉 인사', 문재인 정부는 '캠코더 인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효율적 국정 운영을 위해 철학을 공유하는 인물을 등용할 순 있지만, 야권을 지나치게 배척하거나 대통령이나 측근의 호불호나 사적 인연이 영향을 끼쳐 '권력 사유화' 문제가 불거졌다. 대선에 도움을 준 공신 챙기기도 인사의 상식을 뒤흔드는 요인 중 하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한술 더 떠 사적 관계인 최순실(개명 뒤 최서원)의 인사권 개입을 묵인 · 방조하는 등 초유의 국정농단 사건에 탄핵을 당했다. 당시 최씨는 문화·체육 부문의 주요 포스트에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인물을 심어 각종 사업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최순실의 인사권 개입을 묵인 · 방조하는 등 국정 농단을 자초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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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기관도 사법부도 '눈치만'
중립성 · 독립성이 중요한 정부 권력기관(검찰, 경찰, 국세청, 국정원, 감사원)도 대통령의 인사권에 눈치를 살폈다. 이병기·이병호 전 국정원장은 재임 시절 받은 특수활동비를 박근혜 전 대통령 측에 상납한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검찰개혁을 외쳤던 문재인 정부도 '윤석열 검찰총장 파격 발탁인사' 등 검찰을 적폐 청산용 무기로 사용했다. 그 결과는 검찰공화국과 '스타 정치인 윤석열'의 탄생이었다. 문 정부에서도 검찰 고위인사 이후 '친정부 성향 덕' '반정부 성향 탓'이라는 꼬리표가 붙긴 매한가지였다.
삼권분립의 한 축인 사법부도 예외는 아니다. 대통령은 대법원장, 대법관, 헌법재판소장 등도 임명한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박근혜 정부 시절 사법부의 이익을 위해 재판에 개입하려 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1심에서 무죄를 받았지만 재판부는 직무상 권한이 없어 남용이 없었다는 것일 뿐, 개입 행위 자체가 없었다고 보진 않았다. 청와대(현 대통령실)의 입맛에 재판 결과를 꿰맞추는 게, 비단 양 전 대법원장 때만이라고 보는 이는 거의 없다.
인사권 견제를 위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있지만 장관급 인사의 경우 대통령이 인사를 강행하면 별 소용이 없다. 실제로 국회 반대에도 강행된 장관급 인사는 노무현 정부 3명, 이명박 정부 17명, 박근혜 정부 10명, 문재인 정부 34명이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삼권분립이 제대로 되려면 입법, 집행(행정), 사법이 각 3분의 1 권한을 가져야 하는데, 이런 상황을 균형이라고 하긴 어렵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2019년 7월 25일 문재인 대통령이 윤석열 당시 신임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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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대치에 협치는 사라지고
여당은 철저히 대통령 '하수인' 역할에 그쳤다. 견제보다는 주로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지원하는 데 충실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신의 정부를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라고 불렀다. 여당과 국정의 성패와 책임을 공유하겠다는 취지지만, '행정부와 여당' 대 '야당'의 선을 아예 공식적으로 선언한 셈이었다.
엄기홍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국회의 가장 큰 역할은 견제인데, 국회의 다수당 또는 소수당이 대통령을 옹호하고 성공시켜야 한다고 믿는 것이 (한국 정치의) 현실"이라며 "국회의원을 하다가 장관에 오르는 것을 영전으로 생각하는 등의 모습만 봐도 국회보다 대통령(권한)이 앞서 있다"고 지적했다.
20대 총선 직전인 2016년 3월 24일 5개 지역구 후보자에 대한 공천장에 도장을 찍지 않겠다고 선언한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가 부산 영도구 자신의 선거사무실 앞 영도대교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이 사건은 '옥새 파동'으로도 불린다.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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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령을 반대 여론 돌파에 동원
야당의 반대엔 '정면 돌파'를 감행했다. 여소야대 국면에선 당연히 강대강 대치로 교착 정국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면 야당 주도로 만들어진 법안, 야당 반대에 막힌 정부 발의 법안이 쌓여갔고, 전가의 보도처럼 시행령 정치를 꺼내들었다. 법률 집행에 필요한 세부 규정인 시행령, 시행규칙 등을 대통령이 정할 수 있는 점을 활용, '법 위의 법'을 만들어간 것이다.
법제처에 따르면 역대 대통령의 시행령 공포 건수는 △노무현 2,722건 △이명박 3,746건 △박근혜 3,649건 △문재인 4,602건이다.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예비타당성 조사를 피할 수 있도록 하는 시행령을 추진했고,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의 규모를 축소하는 시행령을 의결했다.
점차 협치의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본 문재인 정부는 이런 행정 입법을 보다 공개적으로 활용했다. 2017년 7월 문재인 전 대통령 직속 국정기획자문회의는 100대 국정과제 발표에서 "시행령·시행규칙 등 하위법령 개정만으로 이행 가능한 국정과제를 적극 발굴해 연내 개정 완료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2018년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시행령으로 확대했고, 2019년엔 국민연금의 경영개입 확대를 골자로 한 자본시장법·상법 등의 시행령을 개정했다.
협치가 실종된 정치권의 극한 대치는 국민 일상으로도 번졌다. 요구사항을 거리에서 외칠 수밖에 없는 국민들과 이를 원천 차단하려는 당국이 맞붙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가 시민사회의 집회를 막기 위해 광화문 일대에 바리케이드 형태로 대형 컨테이너와 차벽을 설치한 일은 이후 '명박산성'이라는 오명을 얻으며 대통령의 독단적 정책 및 불통의 상징이 됐다.
2008년 서울 태평로 서울시의회앞에서 집회 참가자들과 경찰이 서로를 향해 소방호스와 물대포를 쏘고 있다. 시민들은 한편에서 폴리스라인, 이른바 명박산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호송버스를 줄로 잡아당기고 있다. 이날 집회에서는 경찰, 시위대 양측 부상자가 속출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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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근 비리로 레임덕 가속화
이는 그나마 힘이 있던 임기 초반에 가능했다. 임기 말로 접어들면 어김없이 풍경이 달라졌다. 남은 임기가 짧을수록 정책 추진력은 약해지고 지지율이 빠지는 필연적 하락(the law of inevitable decline)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모든 시선은 '차기 권력자'에게 쏠리고, 권력 주변으로 측근 비리가 더해지고, 겉잡을 수 없는 레임덕이 반복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친형 노건평씨의 땅 투기 의혹을 계기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친형 이상득 전 의원과 '왕 차관'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의 정치자금 및 뇌물 수수 의혹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최순실 등 민간인에 대한 국정농단 의혹사건과 함께 대기업 뇌물 의혹 등이 겹쳐 탄핵으로 파면당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 일가의 입시 비리 사건으로 시험대에 올랐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4주기 추도식을 하루 앞둔 2023년 22일 김해 봉하마을에서 노란 우산을 쓴 시민들이 깨어있는 시민문화체험전시관 앞을 지나가고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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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권력의 등장과 함께 대통령은 고독해질 수밖에 없다. 제로섬(Zero-sum) 게임에 진배없는 대선을 두고, 양 진영은 '더 잘 싸울 후보'를 찾는 데 힘을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 패턴 속에 정당 정치로 성장해 온 유연한 인물보다 신선하고 강해 보이는 정치 아마추어가 후보가 되기 쉬워졌다는 게 학계 진단이다.
일단 이기고 나면 권력을 지켜야 하니 전 정권 지우기, 표적 수사 등에 힘을 쏟는 일도 반복됐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결국 비극으로 이어진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뇌물 수수 혐의 수사가 그 서막으로 꼽힌다. 이명박 전 대통령을 포함, 그 이후 대통령 중 누구도 임기 이후를 편하게 보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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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현 기자 here@hankookilbo.com
이지수 인턴 기자 ssu14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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