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왕’의 향연
야코프 요르단스, '왕이 마신다!', 1640~1645년, 빈 미술사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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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비만해 보이는 붉은 혈색의 건강한 인물들로 붐비는 그림 속 분위기는 활기로 가득 차 있다. 색상은 따뜻하고 빛난다. 17세기 플랑드르 화가 야코프 요르단스(Jacob Jordaens)의 '왕이 마신다!' 또는 '콩 왕의 향연'라고 일컬어지는 주제의 그림이다.
요르단스는 루벤스와 반 다이크 이래 최고의 플랑드르 바로크 거장이었다. 성공적인 화가였을 뿐만 아니라 태피스트리와 판화 제작자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는 1630년대 중반에 이 유명한 그림을 처음으로 그린 이래 같은 주제로 계속 시리즈를 제작했다. 시리즈 모두 왕이 잔을 들어 올리고 온 무리가 '왕이 마시고 있다!'고 외치는 순간을 묘사한다. 이 주제의 그림은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모티브 중 하나였다. 안트베르펜의 부르주아 계급은 물론 외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콩 축제의 변형은 오늘날에도 스위스와 독일의 일부 지역에 여전히 남아 있다. 콩 대신 빵 속에 동전이나 페브(fève)라고 하는 작은 도자기 인형을 넣기도 한다.
'콩 왕의 향연'이란 무엇일까? 17세기 가톨릭의 주현절에 이루어지는 플랑드르 지방의 재미있는 풍습이었다. 주현절(Epiphany)은 동방 박사가 예수를 찾아온 날 예수의 신성이 세상에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을 기념하는 기독교 축일이다. 주현절인 1월 6일에는 콩이 든 케이크를 만들었다. 그날 저녁, 교회에서 모든 종교 의식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가족, 친구, 친척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먹고 마시고 즐겼다. 이때, 얇게 썬 케이크가 식탁에 놓인다. 케이크 조각 중 콩이 든 것을 집어 든 사람은 그날의 왕이 되었다.
왜 하필 콩인가? 겨울에 쉽게 구할 수 있는 곡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콩은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길을 떠난 동방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하는 별을 상징했다. 주현절 하루 동안 왕이 된 사람은 가짜 왕관을 쓰고, 장관과 청지기, 백파이프 연주자, 가수, 광대, 의사에 이르기까지 궁정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임명했다. 여왕도 제비뽑기로 선발되었다. 위 그림에서는 여왕의 목에 달걀과 소시지를 묶어 만든 목걸이가 걸려 있고 앞에는 연어 접시가 보인다.
머리에 왕관을 쓴 과체중의 '왕'이 잔을 들어 올린다. 왕은 사람 좋아 보이는 백발의 노인이다. 왕이 술잔을 들고 "왕이 마신다(De koning drinkt)!"라고 외치면,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도 잔을 높이 들고 복창하며 술을 마셨다. 또다시 왕이 포도주 잔을 들면, 모든 사람이 "왕이 마신다!"라고 외쳐야 했고, 이런 식으로 잔치는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그림의 인물들은 술에 얼큰히 취해 보인다. 이미 한 잔 이상을 마신 것이 분명하다. 왼쪽 아래 한 남자는 너무 많이 마셨는지 음식 바구니와 술통이 놓인 바닥에 토하고 있다. 그의 옆에 선 자그마한 어린아이가 어른들 틈바구니에 끼여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에게는 어린이가 음주를 하는 모습이 생경해 보이지만 당시 플랑드르 사람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술을 마시는 아이들은 유럽 회화에서 흔하게 등장한다.
콩 왕의 향연은 귀족과 평범한 시민 모두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이 놀이는 엄격한 신분사회 질서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일시적이나마 해소하는 사회의 안전핀 역할을 했다. 이렇듯, 중세 유럽의 카니발과 여러 축제는 민중의 맺힌 감정의 응어리를 풀어주고 잠시 동안 통제되지 않은 자유를 허락했다. 정육점 주인, 제빵사 같은 사람들이 왕과 귀족 의상을 입고 특권 계층을 마음껏 조롱하고 풍자했다.
화가는 잔치 풍경을 통해 당대의 부유한 부르주아 계급과 서민의 생활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했다. 그 자신도 주현절을 자주 기념했기 때문에 음식이 얼마나 푸짐한지, 그리고 술을 많이 마신 후에 얼마나 시끄러워질 수 있는지 알고 있었던 듯하다. 이런 흥겨움 말다툼과 싸움으로변할 위험도 있었다. 뒷벽에는 'Nil similius insano quam ebrius'라는 문구가 써 있는데, 이는 '술 취한 사람보다 더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없다'라는 뜻이다. 화가는 술의 해악에 대한 청교도적 경고를 하려고 한 것일까? 실제로 일부 평론가들은 이 그림이 과도한 음주에 대한 도덕적 비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다. 요르단스는 청교도적인 칼뱅주의가 전파된 17세기 네덜란드 사회의 예술가이니 그럴 수 있다.
한편, 그림 속의 왕의 모델이 요르단스의 장인이자 존경하는 스승인 아담 반 노르트(Adam van Noort)이기 때문에 풍자의 의미를 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의 그림이 포착한 시끌벅적한 흥청거림은 칙칙한 교훈의 의도보다는 당대 플랑드르 사람들의 활기찬 생명력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직설적이고 단순하며 쾌활하고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화가는 단순히 그 시대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고 했을 것이다.
일부 종교는 술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대부분의 종교에서도 과음은 금기다. 술로 인한 다툼과 사고, 때로는 심신의 피폐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폭음의 결과를 안다 해도 음주는 여전히 많은 이들을 무절제로 이끄는 달콤한 유혹이다. 이 그림을 보는 술꾼들은 요르단스의 수백 년 전 흥겨운 술 파티에 끼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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