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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 (목)

[이붕우의 뒷모습 세상] 무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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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지렁이였다. 귀는 열렸으나 눈은 보질 못했고 손과 발은 여물지 않아 먹이는 대로 먹고 눕히는 대로 누웠다. 부모의 보살핌으로 일어나 앉고 걷고 뛰게 됐다. 자라며 눈이 밝아지고 먼저 된 자 덕분에 생각하고 말하고 쓸 줄 알게 돼 세상의 이치에 눈을 떠 갔다. 그러면서 제법 사람 구실을 하고 어깨에 힘을 주며 사소한 것에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간혹 누굴 돕는 기쁨이 생겼으나 외려 누군가에게는 마음의 상처가 됐다. 때론 주제넘게 남의 일에 참견하고 동산에 오른 행운에 재 너머 태산은 상상조차 못 했다.

플라톤은 가장 지혜로운 자는 알지 못함을 아는 자라고 했다. 주위를 보면 아는 게 별로 없다. 안다고 해도 피상적이다. 물건은 거의 남이 만든 것이다. 편안히 쉬는 내 집, 글을 쓰는 노트북, 없으면 불안한 휴대폰, 음악이 흐르는 스피커, 낡은 자전거, 책장과 아직 못 본 책들, 향기로운 커피와 두툼한 커피잔…. 내가 만든 것은 없다. 그러고 보니 평범하지만 안락한 일상은 자연과 자연을 이용한 인간의 축적된 지혜와 노력으로부터 비롯됐다. 무지의 인간이 무지의 길에서 만나는 놀라움이다.

어릴 때는 무엇이든 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머리가 굵어지면 무지의 인식이 마비돼 조금 알아도 많이 아는 체, 귀퉁이를 보고도 전체를 본 체하다 동굴의 우상에 갇히고 만다. 강퍅해지면 생각이 더욱 굳어져 끼리끼리만 어울린다. 오직 나의 길만이 확실한 길이요, 정의의 길이라 외치며 주먹을 치켜든다. 다양한 생각과 셀 수 없는 길의 조화와 균형이 민주주의라고 말하면서 국민을 참칭하며 제 말만 하고 제 길만 고집한다. 나이 들고 지위가 높아지면 생각의 폭이 넓어져 세상의 온갖 생각을 품고 너그럽게 변할 것 같지만 실상은 반대다. 노쇠하면 신체의 활동력이 떨어지는 만큼 마음은 더 조급해지고 옹졸해지는 듯하고, 파편화된 권력 세계에 속하면 집단이 그은 선을 넘지 못하고 편향된 것만 받아들여 지혜를 더하기는커녕 점점 포악해지는 것만 같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의 길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벌어지는 오만과 편견의 필연적 모순이다.

데카르트가 말했다. “의심하는 것은 사유하는 것이요, 사유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내게 웅크린 확신을 끊임없이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스스로 바로 선다. 의심이 의혹이 되는 것은 남을 먼저 의심하기 때문이다. 남을 의심하기에 앞서 나를 의심하는 것을 덕목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각성과 배움은 무지의 길을 인도하는 동행자다.

뒷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남은 볼 수 있지만 나는 볼 수 없는 뒷모습. 나만 모르는 무지의 영역. 누구나 무지를 달고 산다. 앞과 뒤, 내가 아는 것과 남이 아는 것이 혼재돼 실제와 환상이 착각을 일으키는 길, 그런 불확실한 길을 간다. 앞선 뒷모습 무리를 따라 한 무리의 뒷모습이 된 채 간다. 무지를 잊는 순간 빠져드는 착각의 늪지대, 그 함정을 각성과 배움으로 피해 가며 2025년 새해도 알지 못해 기대되는 무지의 길을 간다.

이붕우 작가·전 국방홍보원장

서울신문

이붕우 작가·전 국방홍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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