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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 (토)

선한 의지·유머·우리를 연결한 무기 ‘모임’[언어의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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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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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겨울 이후 ‘모임’이란 단어의 위상이 달라졌다. 나를 기준으로 동심원을 그리는 모임이 아니라, 더 큰 우리를 품는 모임들이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재난 문자는 울리지 않았지만 심리적 재난만큼은 복구되기 어려운 수준이었던 계엄령 선포 후, 매일같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다채롭고 새로운 ‘모임’이 열렸다. ‘책 읽다가 뛰쳐나온 활자 중독자 모임’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 ‘푸바오의 행복을 바라는 모임’이라 적힌 깃발들이 여의도 하늘에 우뚝 솟아 있었다. 지나가다 한참을 바라본 깃발은 ‘이참에 내 고양이 자랑 모임’ 깃발이다. 깃발에 정말 귀여운 고양이 사진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취향과 관심사가 확고한 모임부터 ‘먹을까 말까 고민되면 먹기 운동본부’처럼 공감의 범위가 넓은 모임, ‘전국 뒤로 미루기 연합회- 그러나 더는 미룰 수 없다’는 해학적 멘트의 모임까지. 깃발에 적힌 문장들을 읽다 보면 이 세계가 완전히 잘못되지만은 않을 거라는 안심이 되었다. 그 아래 모인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임 깃발은 서로를 이어줄 공통의 언어를 새긴 하나의 문장이었다.

다양한 데이터가 증명하듯 이번 집회의 주인공은 20대 여성이다. 동시대 청년들은 언제나 역사상 가장 이기적이고 개인적이라는 오해와 맞서 싸워왔지만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20대 여성들에게 그 오해는 시대착오적이다.

그들은 항상 더 큰 ‘나’를 위해, 더 나은 우리를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기꺼이 달려와 ‘모이는’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국가 재난 상황에서 꺼내든 무기는 반짝이는 응원봉이었고, 소속 정당이나 지역구가 적힌 깃발 대신 생경한 ‘모임, 연구회, 협회, 연대’의 언어를 적은 깃발을 휘둘렀다. 귀엽고 평화로워 보이는 이름이라 얕보면 안 된다. 말랑한 방패로 무거운 혼돈을 밀어내는 치밀한 전략이다. 지적인 유머와 영리한 강인함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그들이 만든 모임들이 이번 집회의 색과 온도를 결정했다.

연결의 세기에 태어난 그들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이어지는 새로운 방식을 잘 알고 있다. 학연, 지연 같은 구시대적 소속 대신, 관점과 서사의 공통분모로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데 탁월한 세대다. 군림보다 공감이 더 효과적임을 아는 천재들이다. 서열이나 우위를 정하지 않고 상대를 향한 연대와 공감의 마음으로 모임을 꾸리는 것.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지 않고 함께 있어주는 곁의 힘을 믿는 것. 그건 20대 여성들이 놀랄 만큼 능숙하게 잘해온 일이다. 서로에게 다가가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더 큰 원을 만드는 모임들. 내 곁의 누군가와 마음을 이어 붙일 때만 가능한 모임의 힘이 이번 집회에서 또 확인되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감을 인용하는 영광을 누리기에 가장 시의적절한 12월. “가장 어두운 밤에도 언어는 우리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묻고, 언어는 이 행성에 사는 사람의 관점에서 상상하기를 고집하며, 언어는 우리를 서로 연결한다”는 문장 속에서, ‘우리를 서로 연결한다’라는 말을 곱씹어본다. 생동하는 단어는 고정되지 않고 언제나 가장 최신의 공기와 호흡하며 진화한다.

이제 ‘모임’은 달라졌다. 선한 의지, 유머 그리고 평화를 담아 ‘모임’은 더 아름다운 언어가 되어 우리를 연결한다.

■정유라

경향신문

2015년부터 빅데이터로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를 분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넥스트밸류>(공저), <말의 트렌드>(2022)를 썼다.


정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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