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혁 기자(mijeong@pressian.com)]
자신을 성폭행하려는 가해자의 혀를 깨물었다는 이유로 가해자보다 높은 형량을 선고받았던 최말자(78) 씨가 사건 발생 60년 만에 재심을 받게 됐다.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지난 18일 최 씨의 재심청구 재항고 사건에서 재심청구를 기각했던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0일 밝혔다.
최 씨는 18세였던 1964년 경남 김해에서 20대 A 씨가 성폭행을 시도하자 그의 혀를 깨물었다. 이에 A 씨는 친구들과 함께 최 씨의 집으로 가 집안을 박살내는 등 난동을 부렸는데, 당시 법원은 강간미수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특수주거침입 등의 혐의만 인정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반면 최 씨는 중상해죄로 검찰에 구속된 채 수사를 받았으며 최 씨로 인해 A 씨가 입은 상해가 영구적이라는 이유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높은 형량을 선고받은 셈이다.
그로부터 54년이 지난 2018년 최 씨는 대한민국에 성폭행 피해 사실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을 보고 용기를 얻어 한국여성의전화에 상담을 요청했다. 2년여간 준비를 거친 최 씨는 정당방위 인정을 받기 위해 2020년 법원에 재심청구서를 제출했다.
부산지방법원과 부산고등법원은 "청구인의 주장은 무죄 등을 인정할 새로운 명백한 증거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최 씨의 재심청구를 기각했다. 반면 대법원은 "최 씨에게 재심을 심판받을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며 원심 판단을 뒤집었다. 2021년 최 씨 변호인단이 재항고장을 제출한 지 3년 만이다.
재판부는 "불법구금에 관한 재항고인의 일관된 진술 내용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고, 진술에 부합하는 직·간접적 증거들에 의해 알 수 있는 일련의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의 사정들이 제시됐다"고 판단했다.
이어 "최 씨는 불법으로 체포·감금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며 "원심은 최 씨의 진술 신빙성을 깨뜨릴 충분하고도 납득할 만한 반대되는 증거나 사정이 존재하는지에 관한 사실조사를 해야 한다"고 사건을 돌려보낸 이유를 판시했다.
대법원의 파기환송 결정에 최 씨와 여성 시민단체는 환호했다. 이들은 20일 서울 중구 상연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에 대한 여성의 자기방어가 정당한 대응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재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싸우겠다"고 밝혔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법의 가장 근본이 되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별도 못하는 우리 사법체계를 후세에 물려주기 부끄럽다는 최말자 선생님의 단호한 결심 덕에 대법원까지 다퉈볼 수 있었고 결국 오늘에 이르게 됐다"며 "최 선생님께서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의 사죄를 받고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으로서의 시간을 길게 누리실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최 씨도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진 물방울이 바위를 뚫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기뻐서 만세를 계속 불렀다"며 "후손들에게는 이런 일이 없게 하고 싶다. 무죄가 나오고 정당방위가 인정될 때까지 도움을 부탁드린다"고 호소했다.
▲'56년 만의 미투' 당사자인 최말자 씨가 2023년 5월 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열린 '56년 만의 미투' 사건 재심 개시 촉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최씨는 1964년 성폭력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고의에 의한 상해'로 구속 수사 및 유죄 판결을 받은 바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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