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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 (목)

우리가 잘 몰랐던 젊은 날의 정약용…"압축파일 풀듯 바라봤죠"(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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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학자 정민 한양대 교수, 30대에 쓴 다산 일기 4종 다룬 책 펴내

"서학과 유학 사이에 있었던 인물…흑백 논리로 접근해서는 안 돼"

연합뉴스

인사말하는 정민 교수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정민 교수가 3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다산의 일기장'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4.12.3 ryousanta@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좌의정 김종수(1728∼1799)가 장차 금강산을 유람하려고 입시(入侍·대궐에 들어가서 임금을 뵙던 일)한 뒤에 임금께서 내린 시에 다음 구절이 있었다.'

1796년 3월 16일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은 '일기'에 이같이 적는다.

좌의정이 중요한 직책이라 해도 굳이 일기에 넣을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임금인 정조(재위 1776∼1800)와 좌의정이 속한 노론 벽파 사이의 힘겨루기를 고려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좌의정의 갑작스러운 금강산행은 왕을 향한 '파업'이자 정치적 '쇼'에 가깝기 때문이다.

34살 젊은 다산은 이를 놓치지 않고 일기에 슬며시 끼워 넣었다. 마치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한 듯한 이 문장은 행간을 풀어낼 때 비로소 그 의미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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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 '다산의 일기장'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정민 교수가 3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다산의 일기장'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4.12.3 ryousanta@yna.co.kr


오랜 시간 다산을 연구해온 정민 한양대 교수는 3일 '다산의 일기장'(김영사) 책 출간 기념 기자 간담회에서 행간을 들여다보는 일을 "(컴퓨터의) 압축 파일을 푸는 듯한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촘촘하게 읽고 행간을 들여다본 기록은 젊은 날 다산이 쓴 일기다.

'금정일록'(金井日錄), '죽란일기'(竹欄日記), '규영일기'(奎瀛日記), '함주일록'(含珠日錄) 등 그간 문집에 전하지 않았던 일기를 우리말로 옮기고 주석을 더했다.

1795년 7월부터 1797년 윤6월까지, 다산이 33∼35세였을 때의 기록이다

일기들은 50년 전인 1974년 학계에 처음 알려졌으나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몇 월 며칠에 어디에서 무엇을 했다'는 식으로 단편적인 사실만 기록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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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일기장' 출간한 정민 교수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정민 교수가 3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다산의 일기장'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4.12.3 ryousanta@yna.co.kr


정 교수는 약 300매 분량의 일기를 순서대로 나열하기보다는 다산이 갑자기 말을 아끼거나, 그답지 않게 '자화자찬'하는 대목에 주목해 속뜻을 헤아리고자 했다고 한다.

그는 "젊은 시절의 다산이 남긴 기록을 마주할 때마다 '뭔가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마치 검열을 거친 듯, 읽어보면 여운이 남는 기록이라 계속 맴돌았다"고 말했다.

천주교 신앙 부분은 다산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거리 중 하나다.

다산이 젊은 시절 천주교에 큰 관심을 보였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으나 그가 서학(西學), 즉 천주교를 저버렸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와 교계 의견이 갈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 교수는 "다산이 살아온 삶의 질량 속에서 천주교는 가볍게 처리할 부분이 아니다"며 "그는 서학과 유학의 중간에서 접점을 어떻게 둘지 끊임없이 고민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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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정약용 필적 하피첩'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러면서 "4종의 일기는 다산의 천주교 신앙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이 있다"며 "말 한마디에 가문의 명운과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정 교수는 기존에 알려진 다산의 모습과 다른 부분도 많다고 단언했다. 이 시기에 남긴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 등의 저술도 마찬가지다.

정 교수는 퇴계(退溪) 이황(1501∼1570)이 제자와 후학에게 준 편지를 토대로 한 '도산사숙록'과 관련, "퇴계의 입을 빌려서 자기 해명을 한 글"이라고 말했다.

이어 "천주교에서 벗어난 기록이라 여겼는데 일종의 '페이크'(fake·가짜)에 가깝다"라고도 했다.

정 교수는 "다산은 '도 아니면 모'라는 식의 흑백 논리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며 "젊은 날의 다산과 그의 생각을 제대로 복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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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강진 정약용 유적'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젊은 시절 다산은 돌격 대상이었고 다혈질이었고, 수틀리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죠. 청렴하고 백성을 사랑한 모습으로는 다산의 모든 면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정 교수의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그는 가장 좋아하는 문인은 연암(燕巖) 박지원(1737∼1805)이라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다산이 남긴 편지, 불교와 관련한 글 등 (연구할 부분이) 어마어마하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다산이 남겼다고 하는 편지 24통도 새로 확보했다는 그는 "'지뢰밭을 잘못 건드렸구나' 하는 생각도 간혹 든다"며 웃었다.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 온몸으로 부딪친 다산이 보여준 통찰, 고민, 좌절, 극복 과정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그건 다산을 통해 우리가 해결해야 할 몫입니다."

688쪽.

ye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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