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이법’ ‘민식이법’…. 학대와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이의 이름을 딴 법이다. 큰 사건이 터지면 일사천리로 없는 법까지 만들지만 대부분 아동은 왜, 어떻게 사망했는지 검토하지 않은 채 사망 처리된다. 반면에 미국·영국·일본은 일찍 아동사망검토제(CDR)를 도입해 재발을 막을 예방책을 찾는다. 중앙일보는 국과수가 최근 10년간 부검으로 확인한 3048명의 아이들이 남긴 ‘다잉메시지’를 통해 어른들이 관심과 주의를 조금 더 기울였다면 막을 수 있는 죽음이 많다는 사실을 심층 취재했다.
지난해 2월 8일 부산 한 아파트 커뮤니티 시설 내 수영장 폐쇄회로(CC)TV 영상에 담긴 심결 군 사고 당시 모습. 사진 심결 군 어머니 유아영씨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
익사, 스쿨존 사고…아이 이름딴 법 만들고 끝
심결(당시 5세) 군은 지난해 2월 부산의 한 아파트 커뮤니티 수영장에서 강습 도중 물에 빠져 숨졌다. 킥판과 등을 끈으로 이어 묶는 보조기구 ‘헬퍼’가 사다리에 끼면서다. 당시 강사가 성인 수강생을 지도하느라 상황을 알아채지 못한 사이 2분 44초 동안 물속에 있던 심결 군은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옮겨졌지만 끝내 어머니 유아영(29)씨 곁을 떠났다.
지난해 2월 부산의 한 아파트 수영장에서 강습 받다 물에 빠져 숨진 심결(당시 5세)군의 어머니 유아영(29)씨가 지난 10월 부산 부산진구 소재 자택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후 아파트 커뮤니티센터 수영장이 규제 사각지대에 있단 지적이 나왔다. 현행 체육시설법 시행규칙의 ‘수영장에 수상안전요원 자격자를 1명 이상 배치해야 한다’거나 ‘사다리는 벽과의 사이에 팔·다리 등이 끼지 않도록 설치돼야 한다’는 규정은 영리 목적의 일반 수영장에만 적용된다. 입장료를 받지 않는 아파트 수영장이나 물놀이 카페 등은 ‘비영리 부대시설’로 분류돼 규제를 비껴났다.
유씨는 “결이가 워낙 물을 좋아한 데다 생존 수영도 배울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었는데 죽어서 돌아올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아이들이 사고로 숨진 상황과 원인, 그리고 사고를 막을 방법은 뭔지 등을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 비슷한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씨가 아파트 커뮤니티 수영장에서 익수사고로 사망한 故심결군의 돌사진을 어루만지고 있다. 송봉근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
韓 5년간 교통사고 400명, 익사 131명…예방책 안 나온다
아동사망 원인 중 질병을 제외한 가장 비율이 높은 사인은 각종 사고사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8~2022년 5년간 각종 안전사고로 사망한 아동은 1041명. 한해 200명을 넘었다. 교통사고(396명)가 가장 많았고 ▶추락(145명) ▶익사(131명) ▶화재(43명) ▶중독(13명) 순이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예방이 가능한 각종 사고사를 면밀히 검토하면 아동사망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모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건 역시 같은 사고가 반복되지 않는 것이다. 아들 이동원(당시 9세)군을 떠나보낸 아버지 이모(47)씨도 마찬가지다. 동원 군은 지난 2022년 12월 2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언북초등학교 앞 어린이 보호구역(스쿨존)에서 만취한 운전자의 차량에 치여 숨졌다. 이씨는 “유족인 부모 힘만으론 바꿀 수 있는 게 없다”며 “정부 차원에서 아동사망을 사례·유형 별로 조사해 예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어떤 정책보다 더 중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신재민 기자 |
━
78년 CDR 도입한 美…후방카메라 의무화, 수영장안전법 마련
2022년 12월 서울 강남구 언북초 스쿨존에서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숨진 故 이동원 군(당시 9세)의 아버지 이모(47)씨가 지난달 13일 서울 구로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학계와 의료 현장에선 사회적으로 이목을 끄는 아동학대뿐 아니라 사고 등 여러 유형의 아동사망을 심층적으로 분석할 제도가 필요하다는 문제 제기가 꾸준히 나온다. 백종우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미국에선 자살한 아동의 자료를 놓고 다양한 전문가가 모여 왜 죽었고, 어떻게 막을 수 있었는지 하루종일 토론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내에선 2020년 양천구 입양아 학대 사망 사건(정인이 사건) 뒤 국가인권위원회와 법무부가 단발성 보고서를 내놓은 것 외에 국가 차원의 심층 조사가 전무한 실정이다. 21대 국회에서 ‘아동사망 조사 및 예방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됐지만 별다른 논의 없이 임기 종료로 폐기됐다. 윤수현 보건복지부 아동학대대응과장은 “신고 없이 학대로 사망했을 경우 경찰 수사나 법원 판결이 나오더라도 지자체로 통보되지 않아 학대 통계에서 누락될 가능성이 있다”며 “체계적인 아동사망 분석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국은 이미 1978년부터 18세 미만 아이의 모든 사망 사례를 대상으로 원인을 분석하는 ‘아동사망검토제(Child Death Review·CDR)’를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37개 주(州)에서 시행 중인 CDR은 의료인, 수사기관, 법조인, 아동복지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팀이 수사 기록과 의료 자료 등을 살피고 아동보호책의 허점과 예방법을 찾는다.
차준홍 기자 |
캘리포니아주 CDR은 한 해 26명이 넘는 아이들이 수영장에서 익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가정집 수영장에 4면 울타리, 잠금장치, 물 튀김 경보기 등을 설치하도록 수십년간 권고했다. 이에 2017년 미국 의회는 ‘가정집 내 수영장을 신설하기 위해선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안전장치를 설치해야 한다’는 수영장 안전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짐 카펜터 콘트라코스타 카운티 전 아동사망검토위원회장은 “아동사망 사건 중 72%는 막을 수 있었던(preventable)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텍사스주 CDR에서 활동한 병리학자 리드 퀸턴 박사는 ‘CDR의 과거, 현재, 미래(2017)’ 논문에서 “약 18만 9000건의 아동사망 사례 데이터를 수집해 화재·물놀이·교통사고 관련 안전대책 등 수많은 예방 조치를 끌어냈다”며 “CDR에서 제시한 어린이 교통사고 사망률 데이터는 모든 차량에 후방 카메라를 달게 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대구 입양아 학대사망 사건 민간 진상조사단에 참여한 소라미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공익법률센터 부센터장은 “민간 조사는 자료 수집, 국회 및 부처와 연계에 한계가 있었다”며 “한국도 책임과 권한을 체계적으로 부여한 CDR을 도입해 아동보호 체계의 약한 고리를 점검하고 빈틈을 채워나가야한다”고 했다.
■ 글 싣는 순서
1화 - 아이들의 ‘숨은 죽음’
2화 - 죽음 막는 아동학대 프로파일링
3화 - 우연한 아동 사고사는 없다
4화 - 아동사망검토, 해외는 어떻게?
※아래 링크에서 시리즈 기사를 읽어보세요.
https://www.joongang.co.kr/series/11693
이수민·이영근·이찬규 기자 lee.sumin1@joongang.co.kr
▶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