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5 (월)

개도국 현실 외면한 선진국… 기후 재원 마련 ‘예견된 부진’ [심층기획-COP29, 기후위기 현장을 가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하> 또 지연된 환경시계

행사장 부스 운영에 수억∼수십억원

재력 따라 선진국 ‘화려’ 개도국 ‘허름’

기후위기 최대 피해국가들 ‘과소대표’

기후 재원 책임·성격 선진국 입김 작용

주도권 잃은 美 등 “리더십 부재” 비판

국제사회, 2025년 의장국 브라질에 ‘희망’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당사국총회(COP29)가 진행된 아제르바이잔 바쿠는 땅따먹기 보드게임인 ‘부루마블’을 연상케 했다. 비현실적으로 치솟은 물가 때문이다. 각국 정부와 단체가 부스를 열고 토론회와 기술 시연 등 행사를 펼치는 ‘파빌리온’의 자리세는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을 호가했다.

24일 UNFCCC에 따르면 부스는 50㎡(15평), 100㎡(30평), 150㎡(45평) 세 가지 종류로 나뉘었다. 가격(세금 18% 포함)은 각각 7만3750달러(약 1억300만원), 15만3400달러(2억1600만원), 23만8950달러(3억3600만원)였다. 이는 ‘자리세’일 뿐, 부스 운영에 필수적인 장비 하나하나에 모두 추가 비용이 붙었다. 플라스틱으로 된 의자 하나에 20만원을 지불해야 했고, 기술 시연을 위해 들여오는 장비에 살인적인 세금이 붙었다. 하얀색 나무 뼈대로 구획한 부스 외관은 돈을 많이 낼수록 앙상한 나무 뼈대가 아닌 화려한 디자인으로 꾸밀 수 있었다.

세계일보

천차만별 행사장 부스 20일(현지시간)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가 열리고 있는 아제르바이잔 바쿠 올림픽 경기장 파빌리온에 설치된 유럽연합(EU) 부스 모습. 국가의 경제 규모에 따라 환경 정책을 홍보하는 부스 규모는 큰 차이를 보였다. 바쿠(아제르바이잔)=조희연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각 부스의 모습은 주최 측 재력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UNFCCC가 홈페이지에서 공지했듯 “의장국은 파빌리온 공간을 상업적 목적으로 운영”했고, 의장국인 아제르바이잔이 제시한 금액을 감당할 수 있는 유럽연합(EU) 등 부유한 국가들과 의장국은 수십억원을 들여 부스를 꾸몄다.

가난한 국가들은 달랐다. 여러 국가가 연합하고 다른 국가나 단체의 지원을 받아 어렵사리 부스를 열었다. 위치도 입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됐다.

◆과소대표되는 기후위기 취약국

행사장 구석의 태평양지역 환경계획 사무국(SPREP)의 부스는 화려한 장비 대신 사무국에 소속된 19개 도서국을 나타내는 지도와 청량한 태평양 자연을 담은 사진이 벽을 메우고 있었다. 중앙에는 부스를 후원한 호주와 뉴질랜드 정부의 로고도 붙어 있었다. SPREP 부스에 들른 사람들은 보라색, 분홍색 꽃을 하나씩 받아 손에 들거나 귀 뒤에 꼽고 나갔다.

피지 대표단 가브리엘 셀레마 제이콥 마라는 “우리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 꽃을 나눠주고 있다”고 귀띔했다. SPREP은 태평양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들인데다 행사장 앞쪽에 위치한 선진국 부스와 다르게 뒤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존재감을 잃곤 하는데,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꽃을 보면서 ‘태평양 섬나라들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다.

SPREP에 소속된 국가들은 기후위기의 최대 피해자로 꼽힌다. 가브리엘은 “피지는 매일 아침 기후위기 현실에 눈을 뜨고 있다”고 말했다. 피지는 수온 상승과 열대 사이클론으로 자원이 파괴되고 있고, 해수면이 상승해 삶의 터전마저 빼앗기고 있다. 하지만 세계인의 시선에 피지의 위기는 그들의 부스처럼 주변부의 이야기일 뿐이다.

세계일보

중국 부스 모습. 바쿠(아제르바이잔)=조희연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불편한 의제, 예견된 부진

이 같은 부스 운영방식은 기후위기에 취약한 개도국보다 기후위기에 책임이 있는 선진국의 존재감이 과대대표되는 협상장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었다.

이날 UNFCCC가 공개한 COP29 합의문을 보면 당사국은 2035년까지 연간 1조3000억달러(약 1800조원)의 재원을 마련한다는 NCQG(신규 기후재원 목표)를 수립했다. 이 가운데 최소 3000억달러는 선진국 정부가 주도해 마련하기로 했다. 개도국이 요구하는 연간 5000억달러(약 702조7500억원)와 비교하면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재원을 마련할 책임을 기존 ‘선진국’에서 ‘모든 행위자(all actors)’로 넓혔고, 재원의 성격도 공공뿐 아니라 민간까지 열어뒀다. ‘선진국이 공공부문에서 더 지출해야 한다’는 개도국의 요구보다 ‘더 많은 국가가 참여하고 민간 영역에서도 지출해야 한다’는 선진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이마저도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가 얼마를 지출할지에 대한 구체적 명시는 없었다.

NCQG 협상 부진은 예견된 일이었다. COP21 협약에 따라 당사국들은 올해까지 ‘1000억달러 이상’의 NCQG를 설정해야 한다. 구체적인 재원 규모와 갹출 주체를 정해야 했는데, 선진국 입장에서는 도덕적 선언을 넘어 비용 지출이 걸린 현실적 문제인 탓에 논의를 꺼린다는 우려가 지속 제기돼왔다.

실제로 이번 COP29은 사전 협상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됐다. 환경부에 따르면 COP29 개막 이후에도 각국은 NCQG에 있어서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지 묻고 다녔다고 한다. 개막 전까지도 대략적 합의조차 이루지 않았던 것이다.

세계일보

군소도서국(AOSIS) 부스 모습. 바쿠(아제르바이잔)=조희연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사라진 리더… “내년엔 다를 것”

이번 COP29를 두고 “리더십의 부재”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세계자연기금(WWF) EU의 기후-에너지 책임자 알렉스 메이슨은 “바쿠에서 세계 지도자들이 보여준 모습은 실망스럽다”며 “기후위기 피해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려면 훨씬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하지만, EU 지도자와 주요 역사적 오염원들은 여전히 시간을 끌며 지갑을 열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리더 역할을 해주던 미국은 기후위기를 부정하며 파리협정을 탈퇴한 전력이 있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주도권을 잃었다. 의장국인 아제르바이잔은 아람코, BP, 토털에너지스의 CEO를 포함해 1770명의 화석연료 로비스트를 초대하고,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연설에서 “석유와 천연가스는 신의 선물”이라고 발언하는 등 협약에 완전히 반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국제사회는 내년에 열리는 COP30에 희망을 걸고 있다. 브라질은 유엔 기후변화협약이 시작된 곳일 뿐 아니라,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대통령이 집권 후 경제불평등과 기후위기 문제에 적극 대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룰라 대통령은 19일 G20에서 COP30을 “대전환의 COP(turnaround COP)”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바쿠(아제르바이잔)=조희연 기자 choh@segye.com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