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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금)

이창용처럼 말할 사람이 더 필요하다 [뉴스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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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0월 11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기준금리 결정에 관한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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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틈만 나면 ‘부동산’과 ‘교육’ 얘기를 한다. ‘물가나 잡지 뭔 오지랖이냐’는 욕도 먹지만, 그는 국토부 장관보다 부동산을 더 많이 말하고 교육부 장관보다 8학군을 더 언급한다.

그는 “경기침체 때 부동산을 부양하는 고리를 끊자”고 제안하거나 “선분양이 부동산을 로또로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또 “(주요 대학) 강남 학생 비율이 일정 수준을 넘지 않도록 조정하자”면서 “사교육을 전국으로 분산하면 기준금리보다 부동산 가격을 더 안정시킬 수 있다”고 한다.

관련 학위도 없는 나에게, 그의 제언이 효과가 있을지 평가할 능력은 없다. 그러나 평생을 부동산과 교육의 노예로 시달린 평범한 한국인으로서, 지금 이 나라에 존재하는 많은 모순과 양극화가 바로 그 두 가지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리라곤 꽤나 자신 있게 말할 순 있다.

우선 학군과 부동산 ‘급지’의 계급화는 ‘개천 용’의 탄생을 막아 계층 이동 사다리를 박살 냈다. 자녀 교육과 내 집 마련에 대한 공포는 이 시대 청춘들이 결혼·출산을 꺼리는 양대 원인이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급 나누기’도 학군과 부동산 숭배에서 비롯됐다. 학벌은 백분율 입결에 따라, 아파트는 평당 가격에 따라 순서가 딱딱 매겨지니, 한국인은 출신 학교와 거주 아파트의 ‘급’으로 서로의 서열을 가린다. 눈치 문화와 쏠림 현상도 여기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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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파트 단지의 모습.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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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작용은 이것만이 아니다. 전문직이나 대기업 직원 소득으로도 강남 아파트 값 상승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소득이 자본을 못 이기고, 개천 용은 금수저를 앞서지 못한다. 그 결과 제조업 국가가 보장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공감대, 노동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 사회적 자원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거대한 두 소용돌이(vortex)는 상호작용을 통해 점점 영향력을 공고히 한다. 학군은 부동산 가격을 높이고, 높은 부동산 가격은 다시 강력한 진입장벽이 되어 학군의 희소성을 보장한다.

중요한 게 빠졌다. 학원에 돈을 퍼붓느라, 영끌 대출 원리금에 허덕이느라, 가계가 쓸 돈이 없다. 그렇게 시작된 내수 부진은 경기 둔화와 자영업 몰락으로 이어진다. 금리를 내린다고 내수가 사는 구조가 이미 아니다. 두 소용돌이를 벗어나지 못하면, 나라의 미래는 없다

안타까운 대목은 중앙은행 총재가 일부러 욕 먹어가며 부동산과 교육 얘기를 풀어놓고 있음에도, 정치 지도자나 고위관료 중에 이 담론에 호응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통령은 아무리 봐도 나라보다 아내를 더 사랑하는 것 같고, 야당 대표는 자기 재판 챙기기에 정치적 자원을 총동원한다. 부동산과 교육을 말하지 않는 지도자는 위선자 혹은 비겁자이고, 아파트 가격과 학군을 언급하지 않는 정책과 공약은 사기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이창용의 해법이 옳은지는 아직 중요하지 않다. 지금 중요한 건 이런 ‘화두 던지기’에서부터 담론의 장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교육과 부동산 숭배 현상이 나라의 미래를 갉아먹는다는 점을 지도자가 솔직하게 인정하고, 뒤틀린 구조를 풀기 위한 심층적 연구와 구체적 아이디어들을 장려해야 한다. 그렇게 하나씩 튼튼한 징검다리를 놓아가면, 나라를 수렁 속으로 휘감아 들어가는 두 소용돌이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경로도 눈에 들어올 것이다. 지금은 일단 이창용처럼 말하는 사람이 계속 나와야 한다.

이영창 사회부장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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