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철의 스포트S라이트]
3년째 오리온 주니어 테니스단 맡아
테니스 레전드 이형택(가운데) 오리온 주니어 테니스단 감독이 인천 송도 모나크테니스클럽에서 테니스 공 카트를 밀면서 제자들과 나란히 섰다. 왼쪽부터 박예서, 정연수, 김동민, 김장준. /김지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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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택(48)은 젊은 세대에겐 연예인으로 통한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축구나 골프 등 다재다능한 운동 실력과 구수한 입담을 뽐내면서 인기를 얻었다. 올드 팬에게 그는 한국 남자 테니스의 개척자다. 이형택은 정현과 권순우에 앞서 ATP투어(남자프로테니스투어) 우승, 그랜드슬램 대회 16강 진출 역사를 썼다. 은퇴 후 방송, 유튜버, 테니스 아카데미 재단 이사장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던 그는 2022년 7월에는 ‘오리온 주니어 테니스단’ 감독을 이력서에 추가했다. 그는 “국제 대회를 통해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해 메이저 대회에서 활약할 선수를 키워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로부터 2년 4개월 후 인천 송도 모나크테니스클럽에서 만난 이형택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출발이 좋다”며 “무엇보다 공격적인 플레이와 도전 의식을 갖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처음 팀을 맡았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자면?
“입단할 때 주니어 세계 랭킹 182위였던 김장준이 11위까지 올라갔고, 올해 주니어 그랜드슬램 대회에서 2차례나 16강에 갔다. 정연수, 김동민은 청소년 국가 대표다. 우리 팀 선수가 국제 대회 단식에서 8번, 복식에서 20번 우승했다. 나쁘지 않은 출발이다.”
-민간 기업이 운영하는 주니어 팀이란 자체가 낯설다.
“몇 년 전 테니스협회 산하 육성 팀이 있었지만 어린 선수들의 잠재력을 터뜨리는 데 도움을 주기엔 부족했다. 우리 팀은 어린 선수들의 성장을 위해 훈련 및 시설, 국제 대회 출전 경비를 모두 지원한다. 성인 실업 팀도 이렇게는 못 한다. 나 때는 삼성이 성인 팀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는데 지금은 그런 기업이 없다. 주니어 지원은 아무도 안 해본 일이라 부담도 된다. 하지만 우리가 좋은 결과를 만들면 다른 기업들도 관심을 가질 것으로 기대한다.”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개인 종목인 테니스 선수들에겐 함께 훈련하고 숙식한다는 것 자체가 낯설다. 한 조직에 소속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지원을 받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도 못 느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모습이 보였다.”
-선수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은?
“공격적인 플레이다. 한국 선수는 서양 선수보다 체격 조건이 떨어진다. 그래서 더 공격적이고 과감하게 맞서야 한다. 그리고 큰 무대에 자꾸 도전해야 자기 레벨을 높일 수 있다. 일찍 세계 무대에 도전했던 (박)성희 누나가 나 젊었을 때 ‘작은 국내 대회에 연연해 하지 말고 그랜드슬램 예선에 뛰러 나가라’고 했다. 그때 나는 반대였다. 그랜드슬램 1회전에서 탈락해서 포인트, 랭킹 다 놓치는 것보다 작은 대회에서 포인트 쌓아 랭킹 지키려는 생각이 강했다. 누나 조언을 받아들여 3년 정도 더 일찍 도전했다면 내 커리어가 훨씬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먼저 경험해 본 사람 얘기는 무조건 들어야 한다.”
-어린 선수들을 어떻게 뽑나?
“우리 팀 목표가 그랜드슬램 도전이다. 그래서 선수도 당장의 성적보다는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둔다. 현재 랭킹이나 입상 경력, 이런 것보다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칠 수 있는지, 대범하게 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식성도 좋아야 해외 투어 생활도 잘 견딘다. 선수들이 ‘주니어’ 꼬리표를 뗀 다음에 대해서도 많이 조언해 준다. 대부분 고교 졸업하면 국내 대학 진학하고 실업 팀 들어가 안주하는데, 그것보다는 외국 대학에 입학해 또래 외국 선수와 경쟁하고, 경험을 쌓도록 추천한다. 아무래도 국내에 머무르면 도전 의식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때 테니스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요즘 좀 주춤해졌다.
“생활체육으로 테니스 볼륨을 키우는 데는 한계가 있다. 국내에서 국제 대회를 치를 때 랭킹 높은 선수가 오면 꽉 찬다. 정현, 권순우가 지금보다 랭킹을 좀 더 높여주고, 비슷한 기량을 지닌 선수가 여럿 나와야 한다. "
-정현, 권순우가 요즘 부상 부진으로 주춤하다.
“정현은 생각보다 몸이 회복이 잘 안 돼 정신적으로 힘들어했던 것 같다. 권순우는 병역 문제가 걸림돌이다. 하지만 둘 다 아직 젊으니 다시 올라설 것이다. 요즘은 다들 삼십 대 후반까지 뛴다. 그리고 나이 들면 복식으로도 도전해 볼 만하다. 나는 서른 셋에 은퇴했는데 복식으로 좀 더 뛸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선수로 복귀한다는 소리가 들리던데.
“국제 대회는 아니고 국내에서 45세 이상 선수들이 나와 경기하는 대회가 있다. 그거 나가보려고 무릎 수술까지 받았다. 무릎이 아직 완치되지 않은 데다 시기도 놓쳐 내년에 복식으로 한 번 출전할 생각이다. 그런 동기가 있어야 나도 몸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선수 시절 숱하게 많은 정상급 스타와 경기했다.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
“2000년 US오픈 16강전에서 당시 최고였던 피트 샘프러스와 붙었을 때다. 그와 맞붙어 내가 어느 정도일지 나도 궁금했다. 그런데 경기 전날 2시간 간격으로 깼다. 두려웠다. 전 세계에 중계되는 경기에 한 게임도 못 따고 3세트 다 질까 봐 두려웠다. 그런데 첫 세트에서 게임도 따냈을 뿐 아니라 타이브레이크까지 갔다. 그 경기 이후 다른 최고 선수들하고도 붙어보고 싶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앤디 로딕, 로저 페더러, 라파엘 나달, 카를로스 페레로, 마라트 사핀, 앤드리 애거시하고 붙어봤다. 물론 거의 이기지 못했다.”
-이 감독에게 테니스란 무엇인가. 그리고 감독으로서 바람이 있다면?
“내게 테니스는 가족 같은 동반자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만약 근처 학교에 테니스코트가 생기지 않았다면 평생 농사짓고 살았을 것 같다. 테니스가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꿨다. 내가 많은 최고 기록을 이뤘지만, 누군가에게 깨지게 되어있다. 내 최고 랭킹 기록을 정현이 깼고, 권순우가 나를 넘어 ATP투어에서 2차례 우승했다. 앞으로 내가 키운 선수들이 정현과 권순우를 넘어섰으면 좋겠다. 메이저 대회 센터 코트에서 우리 선수가 뛰는 모습을 정말 보고 싶다.”
[강호철 스포츠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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