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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금)

AI가 되살렸다, 스무살 유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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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스무살 유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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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내 맘 속에 어둠이 내리면/ 어느새 저 밖은 별만이 가득한데/ 보랏빛 좋아한 그대는/ 내 작은 뜨락이라오.’

지난 7일 각종 음원 플랫폼에 고 유재하의 새 노래 ‘별 같은 그대 눈빛’이 공개됐다. 고인이 데뷔 전인 1982년,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라이브로 부른 노래다. 오랫동안 카세트테이프 속에 보관되다 인공지능(AI) 기술 덕분에 42년 만에 세상 빛을 봤다. 고인 목소리를 세상에 내놓은 건 친하게 지냈던 밴드 ‘레모네이드’ 전 멤버 유혁(63)이다. 최근 서울 연세대에서 만난 그는 “재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 나게 반가웠다. 이 감정을 혼자만 느끼기 아깝다고, 그를 그리워하는 팬들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음원 수익은 전액 유재하장학재단에 기부한다.

‘별빛 같은 그대 눈빛’은 레모네이드 키보디스트 한석우가 작곡했고, 한석우의 지인 최은정이 작사했다. 당시 친구 유혁을 통해 노래를 접한 유재하는 한 라디오 방송에서 불렀다. 한국 대중음악사 명반인 데뷔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1987)를 발매하기 전이었다. 유재하는 데뷔 앨범 발표 몇 달 후에 교통사고로 타계했다. 유재하에게 ‘별 같은 그대 눈빛’에 매료된 이유를 묻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대신 유혁의 목소리를 통해 스무살 청년 유재하를 만났다.

“유재하가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전날 밤 10시쯤이었다. 전화를 걸어 레모네이드의 ‘별 같은 그대 눈빛’을 알려 달라고 했다. 어그먼트 코드(반음 올린 코드)의 독특한 멜로디 진행이 돋보이는 곡인데, 당시 한양대 작곡과(81학번) 학생이자 복잡한 코드의 노래를 좋아했던 유재하의 관심을 끌기에 딱이었다. 전화로 1시간가량 코드와 멜로디, 가사를 불러줬다. 곡을 이해하는 속도가 천재 같았다. 유재하는 음악을 들으면 악보부터 그리는 ‘배운 놈’이다. 당시엔 악보를 보며 음악 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듣는 귀도 남달랐다. 영어는 못해도 팝송을 기가 막힌 발음으로 따라 불렀다. 연세대 사회학과를 다니다 미국으로 유학 간 나보다 팝송을 더 잘 소화했다. 유재하는 ‘나는 귀가 좋잖아~’라고 농담도 종종 했다.

라디오 생방송 당일, 한석우를 집으로 불렀다. 유재하가 노래하는 순간 카세트 리코더 녹음 버튼을 눌렀다. 생방송인데 기타 반주에 맞춰 가사를 흥얼대는 게 대단하게 느껴졌다. 전날 한 시간 배운 곡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한석우가 ‘조곤조곤 말하듯 부르는 유재하 버전이 원래 내가 생각했던 곡이다. 밴드 편곡이 들어간 레모네이드 버전보다 좋다’고 했다. 그렇게 녹음했던 카세트테이프를 40년 만에 지하실에서 발견했다. 미국에서 빅데이터 전문가로 38년째 활동하는 나는 늘어짐 하나 없는 보관 상태에 뿌듯함을 느꼈다. 동시에 유재하 목소리가 이대로 썩어가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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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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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하 목소리를 디지털 음원으로 변환할 수 있는 방법부터 수소문했다. 음성 복원업체에 맡겼지만 녹음 상태가 불량한 탓에 음질이 좋지 않았다. 낙담했던 지난해 11월, 비틀스 신곡이 나온다는 뉴스를 접했다. 1977년 당시의 존 레넌 목소리가 담긴 미완성 데모곡 ‘나우 앤 덴’을 AI 기술로 복원한 뒤 멤버들 연주와 코러스를 더했다는 내용이었다. 유재하 목소리도 AI 도움으로 음성만 분리할 수 있었다. 목소리를 최대한 보존하는 방향으로 본격적인 음원 제작에 들어갔다.

유재하 목소리에 새로운 악기 연주를 입히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생방송이라 긴장한 탓인지, 일부 구간 박자가 불규칙해 드럼이나 기타를 붙이기 힘들었다. 결국 유재하의 박자에 내가 통기타를 연주하면서 편곡자로도 참여했다. 유재하 감성을 살리기 위해 1980년대에 썼던 기타에 굵은 줄을 달아 연주했다. 녹음하면서 여러 번 뭉클했다. 완성까지 1년 이상 시간과 사비를 들인 보람을 느꼈다.

유재하를 마지막으로 본 건 1987년 나의 신혼집들이 때다. 노래를 부탁하니 ‘이제 데뷔 가수라 멍석 제대로 깔아야만 부른다’고 하더라. 음악에 있어선 뻔뻔하게 말해도 전혀 밉지 않은 사람이었다. 재하야, 많이 그리워서 낸 노래니까 하늘에서도 좋아해 주길 바란다.”

황지영 기자 hwang.jee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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