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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이헌재의 인생홈런]‘철가방 신화’ 우승 포수 최해식 “일-봉사, 늙을 틈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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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광주에서 중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최해식 전 프로야구 KIA 배터리 코치가 선수 시절처럼 포수 자세를 해보이고 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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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 스포츠전문기자 


1996년과 1997년 프로야구 해태의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였던 포수 최해식(56)은 광주에서 중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평생 야구를 했던 그는 요식업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처음부터 짜장면집을 할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다. 은퇴 후 자연스럽게 지도자가 됐지만 한 사건으로 인생이 바뀌었다. 한 선수가 밤늦게 숙소를 ‘탈출’하려다 다리가 부러지는 일이 있었는데 구단은 선수단 숙소 감독을 맡고 있던 그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는 “그 일을 계기로 미련 없이 팀을 떠났다”고 했다. 때마침 아내 김숙희 씨(57)가 장사를 해보자며 그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런데 그게 중국집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전까지 그는 음식을 만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건 배달이었다. 난생처음 오토바이를 타고 철가방을 들었다. 첫날부터 미끄러지며 사고를 냈다. 음식은 다 엎어지고, 입고 있던 청바지에선 피가 배어 나왔다. 그는 “언젠가 한 번은 넘어질 거 빨리 잘 넘어졌다. 이 정도 각오 없이 장사할 생각하면 안 된다”며 털고 일어났다.

배달하면서 “몸을 움직일수록 돈을 번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다. 당시 광주에서는 신도시 건설이 한창이었다. 그는 오전 5시가 되면 공사 현장으로 달려갔다. 추운 날씨에는 인부들을 위해 모닥불을 먼저 피워 놓았다. 인부들이 도착하면 따뜻한 물을 건네고 전단지를 돌렸다. 더운 여름에는 미리 꽁꽁 얼려 놓은 얼음물을 건넸다. 인부들은 그의 가게에 주문을 몰아줬다. 최해식은 “공사판 인부들은 누구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현장에 먼저 나가 있으면서 인정을 받았다”며 “야구선수나 코치로서 자존심은 철저히 버리고 맨발로 뛰었다”고 했다.

배달이 안정되자 주방에서 문제가 생겼다. 장사가 잘되자 주방장이 월급을 올려 달라며 게으름을 피우기 시작했다. 새 주방장을 들여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최해식은 스스로 요리를 배우기로 했다. 요리를 익히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재능을 발견했다. 단 6개월 만에 그는 메뉴판에 있는 모든 요리를 만들어 냈다.

그는 20년 가까이 짜장면 봉사를 종종 해오고 있다. 장애인의 날인 4월 20일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는 빼놓지 않고 장애인복지관 등을 찾는다. 몇 해 전 천주교 신자가 된 그는 “성당을 다니면서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봉사를 많이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도 조그만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다”며 “열심히 일하고 봉사를 하니 늙을 틈이 없다”고 했다.

건강관리는 골프로 한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 필드에 나간다. 카트를 타는 대신 직접 카트를 끌고 다녀야 하는 군(軍) 골프장, 일명 체력단련장을 선호한다. 그는 “9홀을 두 번 도는 군 골프장에서 걸으면서 골프를 친다. 높낮이가 있는 데다 하루에 만 보 이상을 걷게 된다.

그는 딱 60세까지만 일을 할 생각이다. 그는 “아내가 나를 만나 지금까지 고생을 많이 했다. 예순 이후엔 여행을 다니며 여유롭게 지낼 것”이라며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아내와 함께 언젠가는 바티칸을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최해식은 의도치 않게 요리를 배운 것에 대해 늘 감사한 마음이다. 그는 “기술이 있으니 어디를 가도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다. 요즘 주방장 일당이 20만 원은 된다고 하더라”며 웃었다.

이헌재 스포츠전문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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