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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 (목)

당신에겐 어떤 사슴이 보이나요···“일부러 덜 그린 그림, 매순간 새로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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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소 개인전 ‘풍래수면시’

한국 실험미술 대표하는 작가

여러 각도에서 바라본 형태를 겹쳐

일부러 덜 그려 상상력 유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서 전시 중

경향신문

이강소 ‘무제 - 91193’, 1991, 캔버스에 유화 물감, 218.2×291cm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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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발광하듯 형형한 형체를 드러낸 사슴의 모습. 여러 겹의 윤곽선이 겹치듯 그려져 있고, 이목구비는 흐려져 있다. 신성하거나 영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강소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사슴의 그런 모습이 아니다. 여러 각도에서 바라본 사슴의 얼굴을 동시에 그리거나, 윤곽선을 여러 개 그려 ‘사슴’이란 대상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 목적이었다. 내가 바라보는 사슴과 당신이 바라보는 사슴의 모습이 같은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의 평행우주처럼, 수많은 사슴들이 저마다의 우주에 존재할 수 있다.

“일부러 그림을 덜 그리려고 합니다. 그러면 보는 사람이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 연상하고 상상하게 되죠. 제 작업은 순간순간 성립되는 관계와 같습니다.” 지난달 31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난 이강소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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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소 작가. 사진촬영 박찬우.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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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다 만 그림, 던져진 조각, 지워지는 작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이강소의 개인전 ‘풍래수면시’를 채우고 있는 것들이다. 이강소는 한국 실험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다. 1970년대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서울비엔날레 등에 참여하며 실험미술 작업을 시작했으며, 파리비엔날레(1975), 상파울루비엔날레(1977) 등에 참여하며 해외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강소의 초기 실험적 작품부터 최근 회화까지 다양한 매체를 이용한 100여 점의 작품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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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소 ‘페인팅 78--1’, 1978, 단채널 영상, 컬러, 무음, 29분 45초,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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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작가를 지우는’ 작업으로 시작한다. 1978년작 ‘페인팅 78-1’은 투명한 유리를 작가가 물감으로 칠하는 모습을 촬영한 영상으로, 작품이 완성될수록 작가의 모습은 화면에서 지워져 버린다. 창작자인 ‘나’에 대한 회의를 품고 작품에서 작가의 의도를 지워내는 작업을 시각화한 작품이다. 누드 퍼포먼스 ‘페인팅(이벤트 77-2)’은 작가의 몸에 물감을 바른 뒤 천으로 닦아서 지워내는 과정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몸을 닦아낸 물감 묻은 천도 함께 전시장에서 볼 수 있다.

불변하는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가 없다면, 내가 바라보는 ‘대상’도 실재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 이강소의 작업은 내가 바라보는 대상을 의심하고,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를 고민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오리, 사슴, 집, 배 등을 그린 그림들이 그렇다. 무심하게 휙 긋거나 칠한 듯한 그림들은 ‘그리다 만’ 것처럼 보여진다. 프랑스 언론 르몽드 표지에 쓰이기도 한 ‘강에서’(1995)는 거칠고 힘 있는 붓질의 움직임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수양버들 같기도 하고, 강변의 울퉁불퉁한 돌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을 연상할 수 있다. ‘섬에서’(2003)는 폭 3.6m의 넓은 캔버스에 직각 형태의 선 세 개만 그려져 있다. 이강소는 “제목을 ‘섬에서’라고 붙이면 사람들은 섬을 볼 것이고 ‘강에서’라고 붙이면 강을 볼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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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소 ‘강에서-99215’, 1999, 캔버스에 아크릴릭 물감, 259x194cm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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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소 ‘생성 - 06-C-008’, 2006, 테라코타, 50×39×25cm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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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선 무심하게 겹쳐지고 쌓여 올려진 흙반죽처럼 보이는 조각들도 만날 수 있다. 작가가 ‘만들어지는 조각’이라 칭하는 작품들은 허공에 반죽을 던져서 만든 것이다. 작가의 던지는 행위와 중력, 우연의 작용에 따라 만들어지는 조각들은 투박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서로 겹쳐지는 순간의 힘의 작용이 느껴지는 묘한 매력이 있다. 작가의 의도보다는 중력이라는 자연의 힘과 외부적 요소에 작품의 운명을 맡겼다는 점에서 ‘작가 지우기’ ‘그리다 만 그림’과 연결돼 있다.

전시장에선 패기 넘치는 실험미술가였던 이강소가 근대미술에 작별을 고하며 제사상을 차린 ‘근대미술에 대하여 결별을 고함’(1971), 정물화용으로 박제된 꿩 뒤에 꿩의 발자국을 남긴 ‘꿩’(1972, 2018년 재제작) 등 초기작품도 볼 수 있다. 전시장 앞 로비(서울박스)엔 명동화랑에 의자와 테이블을 놓고 관람객들이 막걸리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행위를 작품으로 남긴 첫 개인전 ‘소멸-화랑 내 선술집’(1973)을 재해석한 공간도 만들었다.

전시명 ‘풍래수면시’는 ‘바람이 물을 스칠 때’라는 뜻으로, 새로운 세계와 마주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의식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송나라 성리학자 소옹의 시에서 따왔다. 매번 새롭게 불어오는 바람이 물결에 닿아 파동을 만들어내듯, 이강소의 작품이 여러 관객과 만나 매번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기를 바라는 바람을 담은 제목으로 읽힌다. 전시는 내년 4월1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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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강소의 ‘풍래수면시’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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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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