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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토)

지금부터 ‘짝짓기 확률게임’을 시작합니다[커버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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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직장인들의 ‘로테이션 소개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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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서울 강서구 염창동의 한 카페에서 10:10 ‘로테이션 소개팅’이 진행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20명의 성인남녀가 1명당 10분씩 대화를 나눈 후 자리를 바꾸는 방식으로 단체 소개팅이 이뤄진다. 러브홀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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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신분증이랑 명함 확인할게요.”

지난달 20일 오후 5시. 서울 강서구 염창동의 ‘비밀 공간’에 들어서자 입문 검사가 시작됐다. 여기는 신원을 증명한 자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다. 주민등록증 외에도 명함이나 사원증처럼 소속을 증명할 수단이 필요했다. 은행 대출 창구나 경찰서 조사실 아니냐고? 그럴 리가. 성인남녀 20명이 인연을 찾으러 모인 곳, 10:10 소개팅이 이뤄지는 낭만의 현장이다. ‘소개팅 공장’으로 가는 길은 이토록 낯설다.

이른바 ‘로테이션 소개팅’이 진행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먼저 1번부터 10번까지 각각 번호를 받은 남녀 20명은 순서대로 테이블에 앉는다. 처음 마주 보는 이가 첫 소개팅 상대가 된다. 대화 시간은 총 10분. 10분이 지나면 종이 울린다. 여성들이 앉아 있으면 남성들은 한 칸씩 자리를 옮긴다. 1번은 2번, 2번은 3번, 10번은 1번 자리로 가는 식이다. ‘컨베이어’가 열 번 돌아가면 소개팅이 다 끝난다.

본격 시작 전에는 프로필 카드도 작성해야 했다. 짧은 시간 안에 자신에 관한 핵심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이름과 나이, 키, 직업, 거주지, 취미, 종교, MBTI(성격 유형), 외적·내적 이상형, 연애 시 일주일 만남 횟수 등을 적는다. 자신의 매력을 쓰는 칸도 있다. 잠시 머뭇거리던 참석자들은 ‘솔직함’ ‘반응을 잘해줌’ ‘긍정적’ 등 가장 무난해 보이는 단어를 골라 써넣었다. 이번 모임의 주제는 여행이다. 좋아하는 여행지, 가보고 싶은 여행지도 적었다. 운동이나 음식, 술 등 대화 주제는 매번 달라진다.

“두 분이 늦으시는데요, 일단 시작할게요.” 오후 5시가 넘어가자 여성 호스트가 말했다. 설렘과 긴장이 교차하는 지금, 어색한 분위기를 이겨내고 뭐라도 말을 해야 한다. ‘죄송한데 이제라도 집에 가면 안 되겠죠….’ 후회가 밀려왔으나 시작종이 울렸다.

땡!

‘확률 게임’이 된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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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하시나요?”


“네, 혼자 살아요.”

“부산은 어떠셨어요?”

“바다가 너무 예뻤어요.”

10분은 길고도 짧은 시간이다. 서먹한 분위기가 풀어질 즈음이면 호스트가 종을 울리면서 “이동해주세요!”라고 외친다. ‘방금 대화 좀 재밌어질 참이었는데!’ 싶은 아쉬움이 들 때가 있는가 하면, 상대가 바뀌기만 기다리며 ‘종 언제 치나…’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짧은 시간 안에 앞자리 상대방과 내가 연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가늠하게 된다.

5명이 거쳐 가면 쉬는 시간이 주어진다.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되는 셈이다. 남성들이 자리를 바꾸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대화도 도돌이표로 반복됐다. 설렘과 긴장의 틈새엔 조금씩 지루함이 밀려든다.

“자취하시나요?”

“네, 혼자 살아요.”

“부산은 어떠셨어요?”

“바다가 너무 예뻤어요.”

호스트 이모씨(30)는 제한 시간 설정에 딜레마가 있다고 했다. “10분은 너무 짧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그런데 막상 15분씩 드리면 마음에 안 드는 상대를 만났을 때 참석자들이 너무 괴로워해요. 5분만 지나도 이미 10분이 다 된 것처럼 느끼는 거죠.”

참석자 임모씨(32)는 이날 모임을 “가성비 좋은 방식”이라고 했다. “1:1 소개팅이면 2~3시간 동안 한 사람만 알아가야 하잖아요. 10명이면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은 거예요. 괜찮은 사람 만날 확률이 높은 거죠. 물론 반대일 확률도 있지만요.”

임씨는 초반에 만난 남성과 최종 매칭됐다고 했다. 그는 “부드럽고 선한 인상을 준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성격이 가장 잘 맞을 것 같은 분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일찍 만난 사람과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같은 얘기를 반복하다 보니 뒤로 갈수록 체력에 한계가 오더라고요.”

“안녕하세요. ○번입니다.” 기자가 일곱 번째로 만난 남성은 자신의 번호를 상기시키며 반갑게 인사했다. “사람이 많으니까 누가 몇번인지 헷갈리잖아요. 그래서 계속 제 번호를 말해주고 있어요.” 그는 “두 번 정도 비슷한 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면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싶은데 쉽진 않다”고 말했다.

사람이 많아 기억하기 어렵지 않냐고 묻자 ‘○번남’은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기억에 남는 사람이 호감인 거죠. 바로 그겁니다!”

■“가벼운 게 나쁜 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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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임’이나 ‘문토’ 등 취미 모임 플랫폼에 올라온 모집 글을 보면, 로테이션 소개팅 또는 단체 미팅은 하나같이 효율성과 가성비를 장점으로 홍보하고 있었다. “최적의 시간 및 인원 배치로 효율 업(up)” “1명을 만날 시간·비용으로 10명을 만나다” “초고속 고효율 커플 맛집” 등 ‘시간 절약’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의사, 변호사 등 특정 직업을 참여 조건으로 내걸며 ‘검증된 곳’이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호스트 이씨는 ‘소개팅 피로감’을 겪다 이런 모임을 구상하게 됐다고 했다. “1~2주에 한 번씩 꾸준히 소개팅하던 때가 있었어요.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들어서 한 번은 테니스 클럽 겸 소개팅 모임을 나가봤는데요. 생각보다 너무 허술해서 ‘내가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비슷한 모임 여러 군데를 가 본 다음 각각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은 보완해서 직접 모임을 열게 됐어요.”

그는 “모임을 시작한 올해 7월부터 지금까지 (지난달 20일 기준) 총참석자는 약 260명, 짝으로 매칭된 사례는 약 60커플, 실제로 연인이 됐다는 연락을 받은 건 4커플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연애 방식의 출현에는 결혼관 변화의 영향도 있다고 본다. “결혼이 필수였던 시절에는 연애도 신중하게 할 수밖에 없었겠죠. 지금은 결혼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래서 연애도 조금 가볍게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2~3명 동시에 ‘썸을 타다가’(사귀기 전 알아가다가) 아닌 것 같은 사람은 정리하고 … 이렇게 연애 상대를 찾더라고요. 가벼운 게 꼭 나쁜 건 아니라고 봐요.”

임씨도 “연애도 ‘인스턴트’가 유행인 것 같다”고 말했다. “예전엔 노랫말만 봐도 애절한 감정이 느껴졌잖아요. 한 사람만 바라보고, 오래 짝사랑하고요. 요즘은 강렬하고 중독적이지만 진득하진 않은 게 트렌드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너 아니어도 어쩔 수 없고’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다대다(多對多) 만남을 선호한다는 직장인들은 늘고 있다. 기업 사내 변호사인 장혁준씨(31·가명)는 지난 9월 3:3 직장인 미팅을 나갔다. 장씨는 “1:1 소개팅을 하게 되면 상대방이 결혼 상대로는 어떤지 자꾸 재게 된다”면서 “완벽한 사람을 찾고 싶어하는 순간 오히려 귀찮아지고 피하고 싶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공공기관 5급 행정직으로 일하는 정연재씨(36·가명)도 “몇달 전 ‘공무원 대 교직원’ 미팅을 했는데, 대학생 때처럼 부담감 없이 술 먹고 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고 했다.

데이트 매칭 교양 강좌 ‘연애의 첫 단추’를 기획·설계한 한의숭 전남대 인문학연구원 교수는 “가장 내밀하고 개인적인 인간관계인 연애에서도 효율성과 가성비를 추구하는 경향은 젊은 세대에서 일반화된 형태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면서 “수업을 열면 5분 내 수강인원이 다 찰 정도로 연애 상대를 만나고 싶은 욕구는 강하지만, 동시에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어려워하고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큰 양면적인 심리가 내재해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연애 프로그램 흥행과 맞닿은 현상이라는 분석도 있다. <나는 솔로> <하트시그널> <환승연애> <솔로지옥> 등 각종 연애 리얼리티 방송 인기가 이어지면서 ‘여러 사람 가운데 내 짝을 찾는’ 경험을 일상에서도 누리려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서울시나 대한불교조계종 등 지자체·종교계도 앞다투어 연애 리얼리티를 벤치마킹한 프로그램을 내놓고 있다.

■n번 남녀의 ‘시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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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힘드시죠? 빠르게 인사 한번 하겠습니다!”

약 두 시간의 소개팅이 마무리되자 호스트는 1번부터 10번까지 차례로 번호를 불렀다. 10명과 ‘고효율 소개팅’을 마치고 첫 자리로 돌아온 이들은 자신의 번호가 불릴 때마다 일어나서 꾸벅 인사를 했다. 매번 박수가 쏟아졌다. 마음에 드는 상대에겐 “이름 기억해 둘게요” “나가서도 보면 좋겠네요”라고 말해둔 이도 있었다. 나는 너를 찍을 테니 너도 나를 찍어달라는 ‘시그널’인 셈이다.

나가면서는 입장 시 작성했던 프로필 카드 하단에 ‘더 알아보고 싶은 2명’을 적는다. 내가 선택한 상대방도 나를 선택해야 매칭이 성사된다. 매칭된 이들은 호스트를 통해 서로의 연락처를 받아볼 수 있다. 경우에 따라 내가 선택한 두 명과 모두 매칭되는 행운을 안을 수도 있다. 사랑의 작대기가 어긋난 이들 중에서는 딱 1명에게만 하고 싶은 말을 전할 수 있는 ‘라스트 찬스’가 주어진다.

이날 오후 9시. 호스트에게 메시지가 왔다. “총 6커플 매칭됐습니다. 매칭되신 분들은 연락처 별도 전달 드릴게요. 오늘 만남이 우연에서 운명에 닿기를 바랍니다. 혹시 매칭이 안 되셨더라도 단지 오늘 내 인연이 없었을 뿐이니 실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라스트 찬스는 오후 10시까지였다.

“대화 즐거웠어요.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괜찮으시면 더 얘기를 나눠볼 수 있을까요?”

“덕분에 추억 만들었어요. 연락되면 좋겠네요.”

n번 남녀를 향한 ‘마지막 유혹’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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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 기자 e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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